봄빛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봄

by 무재

봄이면 봄의 색을 보러 간다.

늘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수선화, 개나리, 유채, 민들레 같은 노란 친구들을 발견하곤 이제 봄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철쭉, 진달래, 주연배우 벚꽃이 흐드러지면 이 봄이 만개한 것처럼 풍성해진다. 그럴 때 봄은 아주 큰 꽃다발을 품에 안고 수줍어하는 사람 같다. 도심의 대로변에,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유원지에 솜사탕 같은 벚꽃 나무가 흔들리면 추운 계절을 막 지나온 모두의 마음에 봄볕이 스며든다. 굽은 골목길 어귀에서 목련 송이가 툭 떨어지면 같이 애잔해진다.

그러고 보면 꽃잎 하나하나, 풀 한 포기에 동요되고 동일시되는 것도 봄이 유일한 것 같다. 봄이 하얗게 흩날리는 거리에선 누구나 청춘이 되고 다시 시작될 무언가를 염원하게 된다. 연두색 속살을 보고 애틋해진다. 학생 때까지 봄과 3월과 새 학기가 거의 같은 단어였는데, 이제는 사람의 계획이 아닌 자연의 계획이 곧 봄이 되었다. 달력의 숫자 대신 푸릇푸릇해진 창밖의 색과 따스한 바람을 싣고 온 꽃잎이 마음을 부풀리고 이제 계절이 바뀌었다고 속삭여준다.

사실 모든 날이 찬란한 건 아니다. 황사와 미세먼지와 갈수록 변덕스러운 날씨는 안 그래도 짧은 이 계절을 더 빨리 우리에게서 내쫓으려 한다. 그럼에도 늘 봄을 찬란하게만 기억하는 건 환한 조명을 켠 듯한 봄의 거리를 늘 발견하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혼자일 때도 혼자인 기분을 몰아내 주었고, 함께일 땐 그게 누구든 우리의 한 페이지를 파스텔 톤으로 물들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엔 더욱 집 안에만 있고 싶지 않다. 찌뿌둥한 몸을 편 작은 동물들처럼 세상을 탐색하고 싶다.

일상은 여전히 지루하고 간혹 어긋나기도 하고, 지난겨울과 올봄의 나는 한 끗도 달라진 것이 없더라도 마치 새 옷을 입은 것처럼 몸을 재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 그러면 계절은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반갑게 손을 잡아줄 것이다. 새롭지 않아도 모든 게 새로워지는 계절, 많은 걸 잃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리셋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시점, 간질간질한 코와 모래바람이 눈을 흐려도 따뜻한 빛과 색이 둥둥 떠다니는 풍경만을 기억할 수 있는 날들. 봄은 그런 계절이고 나는 기꺼이 봄의 환상만을 껴안을 것이다. 내 사진첩엔 매년 비슷하지만 다른 봄의 기억이 가득하고, 언제까지고 쌓일 이 단편 단편이 최후의 내가 기억하게 될 '봄' 그 자체가 될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봄은 늘 이렇게 분홍, 노랑, 초록의 가느다란 선들이 제피로스의 입김에 휘날리는 아름다운 시작이기에. 별것 없던 아주 평범하고 지친 어느 퇴근길 저녁 빌라 앞에서 하얀 조명을 밝히고 나를 향해 손을 뻗던 큰 벚꽃 나무 한 그루를 내가 기억하듯, 그런 봄의 단편만을 나의 봄으로 저장할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게임을 한 판 두 판 깨나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