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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옥 Nov 30. 2021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12)

화해를 위해 진정제를 먹다

나는 오늘 돼지고기를 빵가루에 입혀 튀기는 돈가스를 만들 예정이었는데  만들지 않고 가게로 출근을 했다. 

점심시간에, 


시아버지: "오늘 뭐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야?"
앤디: "오늘은 점심에도 아침처럼 마른 빵이나 먹어요."
시아버지: "뭐라고? 맛있는 따뜻한 음식 안 먹고?"
앤디: "아뇨, 마른 빵 밖에 먹을 거라곤 없어요."
시아버지: "왜?"
앤디: "기옥이가 집에 다시는 안 온대요. 기옥이가 음식을 안 만들면 누가 해요? 내가 요리 못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
시아버지: "그럼 우리 피자 주문해서 먹도록 하자"
앤디: "아뇨 내가 빵을 드릴게요. 금방 만든 음식이 언제나 맛있지요. 기옥이 음식을 참 잘 만드는데..."
시아버지: "그건 나도 잘 알아"
앤디: "그러니 기옥이 약을 올리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각본은 내가 미리 짰다. 그래도 말이 먹혀 들어가지 않으면 내가 만들려고 사놓은 날고기라도 보여 주라고 했다. 판단력이 어린아이와 같으니 아이 수준이 돼서 설명해야 하니까, 시아버지를 성인 취급하다가는 성인인 우리가 지쳐 머지않아서 기권을 할게 뻔하다. 그러면 아버지가 불쌍하기도 하지만 , 그것 봐 내 말이 맞았지! 하며 통쾌해할 시숙 생각해서도 그렇게 쉽게 하얀 깃발을 올릴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앤디에게 시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해 사과하도록 하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사과도 안 받고 들어가면 집에 안 들어온다고 한 내 말에 신빙성이 없으니까, 기대했던 대로 오후 3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앤디: "여기 당신이랑 통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꿔 줄게"
시아버지: "{들뜨고 흥분된 음성으로 } 앤디가 그러는데 너 다시는 집에 안 온다고 그랬다며?"
나: "네 안 가요! 당신이 우리를 이래라저래라 명령만 하고 괴롭히니까요, 피곤해서 못 살겠어요! 나 조용히 살고 싶어요"
시아버지: "미안해! 내가 다시는 안 그럴게 , 내 맘은 그게 아니었는데..."
나: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면 오늘 저녁에 들어갈게요."
시아버지: "그럼, 다시는 안 그런다고 약속하고말고"
나: "그럼 이따가 집에 갈게요"


그 약속을 지금 홀딱 믿을 순 없지만 한 가지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아이가 돼 버린 시아버지가 갑자기 성인으로 돌아오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진보를 하면, 아니 우리를 조금이라도 편히 살게 내버려 두면 우리는 만족이다. 

처음부터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결정한 만큼 각오는 단단히 한 우리니까.  

오후 6시에 내가 층계를 올라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참을성 없는 시아버지는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자마자 서론도 없이 다짜고짜 묻는다. 


시아버지: "내 사과를 받아 줄 거야?"
나: "예, 당신이 변한다고 약속하면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말고요. 내가 여기 당신 집에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알고 있죠? 우리 집이 따로 있지만 당신 때문에 당신 집의 조그만 방에서 살고 있잖아요."
시아버지: "알고말고! 오늘 저녁에 우리 화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자진해서 수면제를 먹어줄게, 저녁에 깡패짓을 안 하게"


뭔가 축하하려면 샴페인이나 포도주를 마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시아버지는 수면제를 축하하는 의미로 자진해서 먹어준다며 자신이 조용해야 우리가 편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축하할 만큼 기뻐할 일이기도 한 것을 아는 모양이다. 내가 물로 된 진정제를 숟갈에 따라 주자, 맛없는 약을 기분 좋은 듯 삼키더니,


시아버지: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내가 먼저 진정제를 요구한 거야!"


우리를 위해서 진정제를 먹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공치사를 하며 내 맘에 들기 위해 야단이다. 엘리가 보리죽을 가져와 우리 모두 그 죽을 먹었다. 독일 사람도 보리를 오래 끓이다가 고기와 당근이나 파란 콩 등의 야채를 넣고 걸쭉하게 끓여 먹는다. 


시아버지: "아! 맛있게 먹었다" {크게 하품을 하면서}
나: "피곤해요?" 
시아버지: "아니 아직 안 피곤해, 하지만 나 곧 잘게! 나 오늘 저녁엔 깡패짓 안 하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지"
나: "오늘 낮에 많이 주무셨어요?" 
시아버지: "응 많이 잤어, 하지만 점점 피곤해지네 , 하긴 피곤해지라고 안정제를 먹었으니까! 오늘은 우리의 화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자진적으로 안정제를 요구한 거야"


화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진정제를 자진적으로 먹어준다, 는 말은 아마 이 세상 사람들이 전혀 써보지 않은 말 일 것이다. 나도 생전 처음 듣는 생소한 문장이라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고 되새겨 봐야 했다. 앤디가 낮에 아버지를 지켜보니까 초조해하며, 기옥이랑 문제를 해결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그러더란다. 맘에 없는 행동을 끊임없이 하지만 이론은 박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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