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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옥 Dec 13. 2021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27)

감사의 표시 / 참을성이 바닥나다

5월 12일  

#감사의 표시


오늘 우리는 여섯 명의 여자들을 초대해 함께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여러 종류의 케이크는 빵집에서 사 왔고 커피는 커피 기계에 내렸고 커피잔과 접시는 시어머니가 옛날에 사서 쓰던 하얀 사기에 연한 분홍 꽃무늬와 연두색의 잎이 많이 그려 있는 것이다. 

여든여섯 살 먹은 빨래하고 설거지해주는 엘리 할머니, 남 돕기를 좋아하는 그래서 내가 앞으로 자주 부르려고 마음먹은 아니타 아줌마, 수다스럽고 감정적이어서 잘 울고 쉽게 상처를 받는 그러면서도 누구한테나 잘해주고 싶어 하는 아스트맅, 가끔 우리 집을 청소해주고 우리 없을 때 시아버지도 보살피다가 시아버지가 코도 안 곯고 조용히 자면 혹시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며 마음을 졸이던 스페인 여자 요새파, 그리고 시아버지 집에서 가깝게 사는 게르티와 엘리자벳을 불렀다. 그동안 우리 때문에 수고해줘서 고맙다고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5월 13일

# 참을성이 바닥나다


시아버지가 오늘은 브레이크가 완전히 고장이 났는지 우리 이름을 쉬지 않고 거의 간격도 없이 부른다. 기옥 기옥 기옥 앤디 앤디 기옥 앤디 사정없이 우리 둘의 이름을 번갈아 불러 저녁 아홉 시에 나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나는 아버지 방으로 가 제발 우리 이름을 고만 부르라며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우리 당신 때문에 도저히 못 살겠다고 이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했다.  

앤디: "참을성이 많은 당신이 웬일이야?"
나: "참는데도 한도가 있지, 다른 여자 같았으면 시작도 안 했거나 벌써 도망갔을 거야"

그러고 나서 시아버지는 소나기가 갑자기 뚝 그치듯 더는 우리 이름을 주룩주룩 안 부르고 조용했다.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다. 아마 이번엔 침이 너무 셌나 보다. 어쨌든 우리는 당분간 만이라도 살 만했다. 소낙비가 그치고 나서의 조용함? 아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멈추고 나서의 정적? 평온함 같은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밤 열한 시에 나는 아버지가 자도록 이불을 덮어 주려고 들어가 또 한 번 경악해야 했다. 아버지가 사자가 먹이를 찢어놓듯 기저귀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이다. 침대와 바닥 여기저기에 젖은 기저귀 조각 들이 흩어져 있다. 

우리는 한밤중에 침대보를 갈고 아버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어 주고 녹초가 돼서 가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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