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뤼미쌤 Feb 15. 2022

내 선택들을 믿어줄래요.


“직업이란 내게 어떤 의미일까”의 후속편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상담교사로 딱 1년을 다 채워가는 이 시점, 내게 이 직업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기록해두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요즘 정말 핫하고 유명해진 오은영 박사님의 책을 읽었는데,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내 등을 토닥여주는 듯한 느낌을 받은 구절이 있어 우선 인용해본다.


 그럴 때가 있어요. 매일매일 잘해 오던 일인데, 문득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이 들 때 말이에요. 그때 그걸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후회합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억울함과 기대는 누구에게나 있어요. 하지만 아마 놓쳤다고 생각하는 그 길로 갔어도 분명히 후회는 남을 겁니다.

 가지 않은 길은 그리워하지 마세요. 잠시 스치듯 상상해 볼 수는 있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길이 최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선택의 순간, ‘내’ 세포 하나하나가 최선이라고 판단해서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지요. 상황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인생은 대부분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 안에 나도 모르게 그려 놓은 ‘행복의 그림’에 의해 결정되었을 거예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불현듯 허무감이 들 때는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선택의 순간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내’ 행복의 그림은 무엇인가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에 대한 나만의 기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세요. 선택의 순간이 오면, 거기에 맞춰 더 상위의 가치에 우선순위를 놓고 서열을 정해야 합니다. 뭐든 자신이 최상의 가치로 두는 것에 따라 살면 돼요. 그게 옳아요.

 […] 일상의 사소한 선택들이 모두 인생의 방향에 조금씩 영향을 주지만, 결정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선택들이 있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내’가 누구와 생각을 나누며 살아갈 것인가 등이죠. 이런 선택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주변의 반대가 있더라도 반드시 주체가 ‘내’가 되었으면 해요. 주변의 상황에 밀려서 서둘러 선택하지 마세요. 분노와 원망이 커질 수 있어요. ‘대학에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출신하고 아이를 키우는 삶’은 겉으로는 매우 소박해보이지만, ‘내’ 인생의 행복들을 크게 결정짓는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내’ 행복의 그림에 맞춰서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해야 해요. 누군가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말이지요. 그래야 이 다음에 후회가 덜합니다.

오은영의 화해(오은영 지음, KOREA.COM) pp.302-304

나는 상담교사를 꿈꾸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심리학 강의를 듣고 공부하는 것이 재밌었고,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영어로 심리학 원서를 읽고 정리하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학점이 잘 나왔고, 그래서 좋아하는 영어영문학을 복수전공하여 심리학과 영어영문학에서 복수교직을 이수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자면 상담교사보다는 영어교사를 더 염두에 두고 교직에 진입했다. 그러던 중에 갑작스럽게 내게 중요한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일은 내 마음에 아주 큰 파장을 일으켰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한 상태와 무엇이든지 다 해내버리는 엄청난 회피성 몰입상태를 오가게 만들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힘든 마음을 잊으려고 공부에 최고로 몰두했고 그 시기에 영어영문학에서도 좋은 성과를 많이 냈다. 처음 들은 영문학 수업들에서  타과생임에도 최고성적을 받고 문학비평에세이로 큰 상을 받기도 했고 교수님으로부터 대학원 제의도 진지하게 받았었다. 중도휴학했을 때 영문학과 영어학 임용 인강을 결제하여 듣기도 했었다. 나는 영어를 좋아했고, 꽤 잘했다. 다만 잘하는 만큼의 자신감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방학이 되었고 또 다른 소중한 사람을 한 번 더 잃게 되었다. 그리곤 정말 하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때쯤이 대학교 상담소에서 상담을 신청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나보다 먼저 대학에서 상담을 받아 본 언니가 강력하게 추천해서 시작한 상담은 생각과는 달리 처음에 나를 더 힘들게 했었다. 그냥 어찌저찌 묻어서 평평했던 내 땅을 마구 파헤치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 괜찮지 않았는데,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다. 상담에서도 그런 얘기를 들었었다. 내용만 들으면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든 일인데, 웃으면서 가볍게 이야기하시네요. 나는 부정적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에 원래부터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너무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용량으로 부정적 감정이 몰려오게 되어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 이렇게나 많은 부정적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너무 놀랍고 충격적이었고,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 방법도 모르겠었다. 15회기 정도의 상담을 받았던 것 같은데, 자연스러운 애도의 기간이었음을 고려할 때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아픔을 겪고 나니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더 넓어지고 너그러워졌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상담자의 도움을 받고 나니, 내가 전공하는 심리학의 분야로서 상담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을 돕고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귀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잠시 영어공부를 접고 상담 전공에 매진해보기로 했다. 제대로 공부해봐야 나랑 맞는지 안 맞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작 한 학기 정도 더 공부하고 경험한다고 판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만이었지만, 상담공부는 내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일반대학원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배워보고 싶었다. 영어도 좋아하고 잘하지만 외국인으로서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봐야 내가 그 분야에서 어떤 입지를 다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애도를 회피하고 미친듯이 공부하고 글을 썼던 그 시기의 버거운 감정적 기억들이 뒤섞여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는 현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의 주수입이 없는 상태였고, 나는 최대한 빨리 취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 취업형 스펙이나 활동이 없었기에 갑자기 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내가 가진 자격증을 활용하여 취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교사가 되겠다고 졸업을 늦추어 1년을 더 다니며 복수교직을 따고 그 다음에 언제 붙을지 모를 영어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선택지 1번. 아직 내가 잘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공부하는 것이 재밌으니 더 배워보고 싶어서 상담/임상 전공으로 일반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선택지 2번. 복수교직을 포기하고 심리 교직으로 졸업하여 한참 많이 뽑는 상담교사 임용을 준비하는 선택지 3번. 합격한 영어교직을 중도포기하는 것은 아까웠지만, 상담교사로 임용을 볼 것이라면 많이 뽑는 지금 임용을 보는 것이 중요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와 걱정과 아쉬움의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끌고 나아갈 체력도 마음의 힘도 없었고 조금 철없게 보이더라도 불확실한 미래를 감수하며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겠다고 떡 하니 보이는 현실에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척할 뻔뻔함도 부족했다. 그래서 내가 결정했다. 2020년 1월 1일에, 전문상담 임용을 준비해보기로. 그리고 이왕 결정한 김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그렇게 운과 실력이 조화를 이루어 감사히도 상담교사가 되었지만, 첫해가 참 힘들었다. 상담초심자로서의 두려움, 막막함, 공포감, 역전이가 꽤나 벅찼으나 이것이 상담초심자라 그런 것인지 사회초년생이라 그런 것인지 신규교사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었다. 그래서 상담을 탓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분명 내가 결정한 전공이고 내가 선택한 직업인데, 내가 선택한 게 아닌 것만 같았다. 책임을 미루고 싶었다.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타협안이었던 것이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방학을 지내면서 마구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던 진흙탕에서 부유하던 흙과 먼지들이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맑아진 지금은 생각과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지금 내가 선택한 이 직업과 진로는 매 순간 순간 내가 내린 최선의 선택들로 이루어졌고,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 마음 속의 행복의 그림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이끌린 길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이제야 의미를 좀 찾아볼 마음의 여유와 틈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구절이 참 와닿았나보다.



내 행복의 그림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행복해지고 싶을까.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을까.

정답은 없지만, 계속 생각해보고 구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순간 순간에 최선의 선택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자꾸만 내가 주체로서 선택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쩔  없는 상황 탓으로 돌리게  여지가 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출산하여 아이를 양육하는  결코 만만하게  일이 아니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는  과정들이 벅차고 힘든 과정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평범하지만 힘들고 벅찬 삶을 꿈꾼다.  삶의 순간순간들에서 작고 소소한 기쁨과 눈물을 충분히 누리고 겪으면서 아기자기한 삶을 살고 싶다. 인생은 고통이 베이스고 행복이 양념가루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왕이면 고통의 길을  붙잡고 걸어가며 찰나의 행복을 놓치지 않고 함께 웃을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이런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한 평범한 삶의 경험들을 토대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과 도움을 제공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 기여를 하면서도 일상을 영위할 만한 정당한 경제적 보수를 받을  있으면 좋겠다.  삶의 경험 자체가  일의 양분이 되고, 일로 인한 배움과 금전적 보상이  삶을 지탱하고 성장시키면서, 일과 삶의 선순환이 있으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같다.


행복의 그림은 그리되, 너무 미래에만 매몰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 오늘 하루만큼의 최선을 다하며, 매일 밤 내 하루를 수용하고 만족스럽지 못했던 부족한 나를 용서하면서 그렇게 어제의 찝찝함을 내일로 넘기지 않는 하루를 살고 싶다.


저도 걱정이 될 때가 있어요. 불안할 때도 있습니다. 후회가 될 때도 있죠. 기분 나쁠 때도 있고요. 화가 확 오르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아예 안 들지는 않아요. 그러나 제 오늘 하루의 목표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입니다. 내 안에 스스로를 비하하는 생각이 든다면 좀 다듬고, 미래가 걱정된다면 좀 진정시키면서 오늘 눈을 떠서 잘 때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잘 지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 하루 최선’인 것이죠.

 오늘 하루가 중요해요. 결국 오늘 하루가 쌓여서 ‘내’가 되는 겁니다. 오늘이 내일의 거름입니다. 미래는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세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오늘의 안정을 못 누리고 삽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긴 해야겠죠. 하지만 그 적정선을 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오늘을 항상 불안 속에서 보내게 돼요.

 최선이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선입니다. ‘내’가 오늘 좀 피곤해요, 그러면 조금 쉬는 것이 최선이예요. ‘내’가 오늘 걱정이 너무 많아요, 그러면 ‘내가 뭘 걱정하지?’를 좀 생각해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내’가 오늘 기분이 너무 안 좋으면 ‘오늘은 사람을 덜 만나야겠다’하면서 하루를 그럭저럭 넘기는 것이 최선이지요. ‘내’가 오늘 너무 날카로우면 ‘잘못하면 오해를 사니까 말을 좀 줄여야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오은영의 화해(오은영 지음, KOREA.COM) pp.308-309​
작가의 이전글 모든 말에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