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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다가오던 어느 날

아름다운 노년을 그려본다

by 행복담기 씨소

여름이 다가오던 어느 날

씨소 에세이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탈 없이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안도감에 아무도 없는 식탁을 마주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창밖의 날씨를 눈으로 훓기도 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같은 시간에 일어나 밥상을 차리고 아이들 가방에 텀블러를 하나씩 챙겨주며 두 번의 강산이 변했건만,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며칠 전 아침, 가족들이 빠져나가고 나 홀로 멍을 때리고 있었다. 거실로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봄이 지나가고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환기도 시킬 겸 베란다 큰 창을 활짝 열었다. 여는 순간, 코끝에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장미향이 담긴 꽃바람이었다.

‘에휴, 꽃이 피고 지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구나.’


하릴없이 지나가는 오전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짧은 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면서 뜻밖에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삐거덕거리는 허리를 살살 움직이며 스트레칭하는 노인도 있었고, 우는 아이를 달래며 어린이집으로 가는 젊은 엄마들도 보았다. 그러던 중 내 눈을 사로잡는 한 부부를 만났다. 70대로 보이는 부부는 멀리서도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남편은 아내의 한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에는 강아지를 리드하는 목줄이 들려있었다. 몇 걸음 걷다가 반려견이 킁킁거리며 멈추면 노부부도 멈춰 섰다. 풀밭에 자란 야생화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굽은 허리를 활짝 펴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평온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몇 걸음 뒤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걷고 있었다.

노부부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 부부처럼 평온한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 혼자, 외롭게 말고 남편과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겠지.’


남편과 만나 2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연애 기간에 비해 만남의 횟수는 적었다. 남편을 만났을 당시, 나는 일과 학업을 겸하고 있었다. 기업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통  번역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교육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며 대학원에 진학했다. 일과 공부에 매이다 보니 평일에는 남편뿐 아니라 사적인 일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내가 조금 여유로워졌을 때는 남편이 새벽에 출근하면 새벽에 퇴근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남편에게 진심 담긴 농담을 건넸다.

“그 회사는 연구원이 한 명뿐인가? 이러다 결혼도 못 하겠네. 회사한테 책임지라고 해.”

이렇게 우리의 서른은 지나가고 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주말에만 잠시 만나다 보니 우리 관계는 늘 미지근했다. 뜨겁게 달궈져야 결혼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내 마음과 달리 어느 순간 우리는 부부가 되어 있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의지하며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부부가 되었지만 다른 생활환경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한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은 생각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내 가치 기준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충돌이 생겼고, 결혼과 동시에 복잡해진 가족관계와 챙겨야 할 집안의 대소사로 숨 막힐 때도 있었다. 집안일과 육아로 나만 희생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니까 살아준다. 당신이 내 맘을 알아? 당신하고 얘기하느니 벽보고 얘기한다.’ 억울한 감정을 마구 쏟아낸 적도 있다. 내 말에 남편은 상처를 받고 우리의 행복에는 조금씩 금이 갔다.


나도 이제 조금 철이 들었는지, 결혼생활은 남편이든 아내든 모두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역할도 많아졌고 어깨가 무겁다는 것을 안다. 다정한 부부가 되려면 고집을 꺾고 서로에게 맞춰줄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세 살 버릇 여든간다’ 는 말처럼 나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고 내 의견을 주입시키기도 하고, 나에게 무조건 맞춰주기를 바랄 때도 있다. 때론 ‘나만 사랑해 줘, 날 이해해 줘’ 소리 없는 이기적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도대체 부부란 무엇인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당신과 함께 후회 없이 살았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난 오늘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 부부겠지만 나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부부가 예고 없이 벌어진 사건 사고 앞에서 늘 굳건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조금 가볍게 후회없이 살고 싶다면 힘이 들면 힘들다고 투정 부리고, 못 버티겠으면 잠깐 멈추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한때 나는 배우자에게 짐이 될까 봐, 항상 ‘괜찮다’고 말한 적이 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질식할 때까지 버티는 삶은 자기 학대이자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것을 뒤늦게 알았다. 어떻게 살든 후회 없는 삶이란 없을 거다. 그러니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이기적으로 살아봐도 괜찮을 것 같다.

“나 진짜 힘들어. 당신의 위로가 필요 해요.”라고 말이다.

우연히 마주친 70대 부부의 모습에 생각이 많아진 하루다. 걷다 보니 어디선가 수국 향이 풍겨온다. 봄이 가고 여름이 시작되는 오늘도 잘살아 봐야겠다.


씨소 그림 <우리의 만남과 웨딩>


#노년 #부부 #결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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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