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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텐조 Mar 05. 2024

중립을 위한 변호와 비판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202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이백 이 번째



나는 스스로 중도적이며 다원주의자라 생각은 하고 있다.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고 정론을 수립하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특히 사회와 세계를 보노라면 더더욱. 왜냐하면 나 혼자 다루는 것도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가는데 하물며 외부를 판단하는 것은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다만 기계적 중립이라고 비판받는 진영논리에 휩싸인 정치적 중립보단 경직된 중립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해보고 싶다. 중립은 어느 한쪽에 취우 치지 않고 중간에서 사리분별을 잘하기 위한 기준점으로써 역할을 수행해 내야 한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중립을 표하는 자들을 보면 왜 진영논리와 정치적인 화두에서 중립이 욕을 먹는지가, 어쩔때는 억울하게 또는 타당하게(?) 어느새 내 삶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이 말은 쉽게 표현해 보자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데 이중에 중립을 지킨다 가만히 있는다면 이것이 정말 중립이냐라는 문제다. 인간관계적으로도 가끔 힘이 필요하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 선뜻 나서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라고 생각을 해보면 그 의도가 어떻든 간에 계산하고 재보는 사람으로 비출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하면 사실 확인을 위해 양쪽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중립의 이미지가 맞겠지만 보신을 위한 중립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중립을 지킬 순 없으며 어느새 시간이 흘러 결국 양자택일의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정치영역에서는 회색분자, 박쥐라고 욕을 먹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선 이 사람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별 의욕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보신적 중립이 결국 자기가 이로울 때는 적극적이지만 누군가가 필요로 할 때 입 싹 다물고 가만히 있는다고 하면 제삼자가 보더라도 꼴 보기 싫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중립은 앞에 어떤 성격을 띠는 중립인지에 따라 달라지고 그 어떤 완벽하고 절대적인 역할 또는 성역은 없다고도 생각해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회이슈나 정치이슈도 마찬가지지만 어떠한 정부 예를 들어 진보든 보수든 완벽한 정부 또는 진영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외에의 타인 그리고 사회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항상 중립은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반성해 보지만 그렇다고 중립을 내팽개치냐? 그건 또 아니다. 어쩌면 중립을 위한 중립일 수도 있지만 요즘 생각하는 건 진리나 진실은 스펙트럼에 기초한다고 보고 있다. 극좌든 극우든 중립이든 뭐든 어떤 포지션에 따라 무 자르듯 딱 이거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극좌라고 다 같은 극좌사상을 가지는 건 아닐 테고 극우라고 해서 다 같은 극우사상을 공유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가 있는 포지션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고 상대적 관점에서 누군가 이런 이야기가 있으면 나는 이렇다고 하며 기준이 나뉜 것이다라 생각한다. 첨언하자면 어떤 포지션이라고 해서 어떤 의견이다를 넘어 그 강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극이니 중립이니 온건이니 강경이니도 강도가 아니라 포지션이라 생각한다.

  

결국 문제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 스펙트럼이 있음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곧 중립이 해야 할 아주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선거철이라 혹시 몰라 그동안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나중에 표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다가 정치적 입장을 논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과 태도를 논하는 차원이라 작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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