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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Oct 03. 2024

송별회 자리에서 즉석 면접을 본 사연

Part2. 직장 사람들 저한테 대체 왜 그러세요 ep.09

마음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퇴사 과정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사표를 내고 수리 기간이 한 달 정도 소요되는데 그 30일의 시간을 버티는 게 또 하나의 마지막 과제였다. 나는 퇴사 사유를 대놓고 ‘부장’이라고 말하지 않고 원래 전공 직무(회계)로 가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직무도 사유가 되었다. 그곳에서 익힌 일은 그 기업에서만 써먹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개발팀과 고객센터 사이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팀이므로 가운데서 유동적으로 이 일, 저 일 배울 수 있지만, 전문성까지는 쌓을 수 없겠다고 감히 판단했다. 특히 나 같은 비전공자가 욕심을 부려 개발을 배운다 하더라도 추후에 개발팀에서 일하는 건 무리라고 여겼다. 회계는 한번 배워두면 이 회사, 저 회사에서 두고두고 활용할 수 있기에, 그리고 시간이 쌓을수록 전문성도 생기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회계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아니 그 결정이 맞아야만 하였다.


나는 보통 오전 9시 전에 이사님 방에 커피를 가져다 놓는데, 이사님께서 자리에 계실 때마다 내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계속 설득하셨다. 그럴 때마다 몸 둘 바를 몰라 죄송스러웠다. 퇴사하기로 한 2주 전쯤, 한 번은 이사님께서 잠깐 여기 테이블에 앉아보라고 하시더니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그는 신입은 최소 3년은 있어야 하고 이 일의 전문성을 쌓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3년 이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고 하셨다. 맞는 말이었다. 9개월 일해 놓고(배웠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지만) 감히 전문성을 쌓을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하는 건 오만이었다.


그러나 이사님께 퇴사 사유를 그 부장 때문이라고 말하기 싫었다. 그 이유가 포함되어 있다고 짐작하라는 게 내 본뜻이었다. 만일 부장 때문에 회사 다니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면, 그 부장이 사과하고(이미 사과할 타이밍은 늦었기 때문에) 없었던 일처럼 마무리되는 게 싫었다. 그리고 사과한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o부장 성격으로 봐서 진심으로 사과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이고 나쁜 마음일지 모르지만 누구 때문에 나갔다고 남겨두고 싶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았다. 앞으로는 이보다 더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았고 만약 비슷한 일이 있다고 하면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차라리 다른 곳이 낫지 싶었다(나중엔 이것도 착각이었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변에서 아무리 만류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o부장은 내게 말을 걸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적어도 내가 있는 앞에서는 특별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점심을 먹으러 다 같이 구내식당으로 가는데 바로 내 뒤에서 o부장이 부하직원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o부장 : “야, 우리 그동안 1년도 안 되어 퇴사했던 애 없었지?”(부장은 늘 동조를 유발하는 말을 하는 특성이 있다)

부하직원 : “네.. 아마... 도요..?”

o부장 : “끈기가 없어, 끈기가”


o부장은 앞에서는 내게 말 한마디 없다가 뒤에서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대놓고 말하고는 싶은데 내가 또 위에다가 지를까 봐 말은 못 하겠고, 뒤에서라도 하면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발뺌할 수 있으니 택한 방법이지 않았을까. 더는 나도 대꾸하고 싶지 않아 그런 소리가 들릴 때면 최대한 퇴사 후 뭐부터 할까 재밌고 즐거운 상상을 하며 한 귀로 흘려보냈다.




드디어 퇴사 D-2가 되었다. 이제 이 회사도 이틀만 나오면 끝이라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부서에 팀이 크게 2개로 나뉘어 있어 팀장 겸 부장이 두 분이 있다. 그중 한 명은 나를 괴롭히던 o부장이고, 다른 한 분은 그래도 나를 챙겨주시던 부장님이었는데 부서에서는 총괄 부서장이었다. 그동안 나의 퇴사 2회를 모두 막으신 분이시기도 했다. 일하는 도중 부서장님은 내게 조용히 오시더니 끝나고 자기 팀 식구들이랑 송별회 겸 회식을 하자고 하셨다. o부장이 없고 소수 모임이라서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장소는 잠실역 근처 정육점 식당이었다. 부서장님은 마지막이니 마음껏 먹으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거래처 영업 담당자들도 있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편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o부장이 없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메뉴가 한우였기 때문에 나는 고기에 집중하였다.


부서장님은 거래처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그중 전무 이사라는 분이 회사 들를 때마다 나를 봤다면서 아는 체를 하였다. 그는 멀쩡한 회사를 왜 그만두냐며 내게 퇴사 사유를 물었다. 나는 이쪽 일보다는 전공을 살려 회계 직무를 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더니


"우리 지금 연말에 회계팀 직원 충원하고 있는데 면접 볼 생각 없어요?"

“저야 기회만 주시면 감사하죠(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전무는 갑자기 옆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자고 하더니 바로 면접을 보자고 하였다. 졸지에 송별회가 면접장이 되어 버렸다. 그는 내게 학교랑 전공, 학점 등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 묻고 나서 자기 회사에 대해 소개를 해주었다. 그 회사는 기업마다 서버 스토리지를 납품하여 유지보수를 하고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IT 회사였다. 주 거래처가 지금의 회사이고 회식도 그 회사가 만든 자리였다. 전무이사는 내게 명함을 주었고 다음날 명함에 적힌 메일로 이력서 한 통을 보내라고 하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나를 데려온 부서장님은 그 회사와 지분 관계도 있고 대표랑 다들 잘 아는 사이라고 하였다. 회사 분위기도 훨씬 유연하고 내가 일 배우며 함께 성장하기에 제격이라고 하셨다. 위치도 여의도여서 본가랑 가깝기까지 하였다. 다시 취업준비생이 되어 이력서 넣는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믿을만한 부서장님의 추천이라면 그 회사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미 그 자리에서 아는 사람들 몇몇도 생겼기 때문에 초반 적응도 어려울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나는 다음날 명함에 적힌 메일 주소로 이력서를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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