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는 첫 영업일에 나는 또다시 새로운 회사에 회계 담당 직원으로 출근하였다. 이번이 네 번째 회사이다. 지난 회사는 상사와의 껄끄러움 때문에 도망치듯 퇴사하였지만 커리어 측면에서도 잘 생각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바로 전 직장을 제외하고 첫 회사와 두 번째 회사 모두 전공을 살린 회계 관련 직무였다. 그러나 정통 회계 업무는 아니었기에 내 경력은 신입에 속하였다. 과거는 모두 잊고 새 출발을 하자며 마음을 다 잡았다.
네 번째 회사는 전 회사 내 송별회에 자리에서 거래처 전무이사님(지금은 현직장)과 1차 면접을 보았던 곳이었다. 이전 회사와 지분으로 연결 관계도 있고 무엇보다 부서장님께서 적극 추천한 곳이라 안도하였다. 중소기업이었지만 매출액이 규모 대비 높았고 성장 가능성이 커 보였다. 이곳에서 나도 회사와 함께 성장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회사 규모가 작은 만큼 직원들이 많지 않았다. 나는 경영지원부 소속이었는데 그 안에 회계, 인사/총무, 영업지원으로 파트가 나뉘어 있었다. 회계는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으로서는 알고 보니 나 하나였다. 내가 입사하기 전 한 명이 인사/총무와 회계를 모두 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커지면서 회계 직원을 뽑은 것이고 그게 내가 된 것이다. 경영지원부는 업무를 총괄 지시하는 상무이사(남자)와, 영업지원 3명(여자), 인사/총무 1명(여자), 회계 1명(나)이었다.
업무는 이전에 회계를 담당했던(현 인사총무) 분으로부터 인계받았다. 매일, 매주, 매월마다 하는 일이 정해져 있어 자금일보 작성 및 회계처리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학부 때 회계 자격증을 취득하고 세무법인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으로 프로그램 사용은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전 회사에서 프로그램 서버를 운영한 이력이 있어 몇몇 직원들로부터 프로그램에 관한 질문도 답변해 줄 수 있었다. 업무는 수월하게 흘러가는 듯하였다.
경영지원부는 여자가 나까지 다섯인데 두 분은 차장이라 연배가 좀 있으셨고, 두 명은 나와 또래였다. 처음에 전 회사에서 왔다고 하니까 거길 그만두고 왜 여기로 오냐며 의아해하였다. 물론 나도 가고 싶었던 회사였고 규모와 복지, 연봉을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뭐 회사가 복지와 연봉으로만 다니는 게 아니니까 나는 최대한 이를 잘 설명해 보려고 하였다. 앞으로는 전 회사와 같은 불상사가 없길 바라며 최대한 이 여자들 무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다.
3개월 정도 흘러 업무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회사 분위기가 자유롭고 젊은 층이 많아서 사람들과도 빨리 친해졌다. 경영지원실 여자 무리에도 모나지 않게 적응하는 듯하였다. 그중 나는 J와 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친해졌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로 오해가 생겨 그만 다툼을 하게 되었다. 너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J가 나에 대한 오해가 커졌다. 어느새 J는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누군가에게 상처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전 회사 부장이 더 낫다고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매일 얼굴 보는 사이이고 업무적으로도 접점이 많아 부딪칠 수밖에 없는데 냉전이 지속됐다. 나는 J에게 좀 더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상대해 주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하고 억울해서 누군가에게 터놓고 싶지만 내가 하소연할 곳은 회사 내에선 없었다. J는 사람들에게 이미 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J과 이 회사에서 지낸 세월이 있으니 고작 3개월 다닌 나와의 친밀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경영지원부 소속 위 차장들도 우리 둘 사이를 모른 척하였다. 사건 자체도 내 잘못이 아니었다. 다만 나의 어떤 행위가 본인 말로는 오해받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는데(그럴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 오해를 푸는 방식이 서로 달라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관계가 회복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 단계까지 가버렸다. 나는 또다시 이 회사를 다닐 수 없겠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나는 찝찝하였지만 J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마무리하였다. 이후 J에게,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사람들에게 서운하고 이 싸움에 이골이 나서 사표를 제출하였다. 부서장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솔직하게 말은 할 수 없어 업무 핑계를 대었다. 가뜩이나 일을 혼자 하고 있으며 잘못 처리해도 제대로 가르쳐 줄 상사가 없어 옮기고 싶다고 말하였다(이 말도 맞긴 하였다). 그렇게 내 퇴사 사유가 받아들여지는 듯하였다. 퇴사 날이 가까워지자 그래도 나는 J와 화해하고 나가고 싶었다. 먼저 화해하자고 제안했고 J도 받아들여 오해를 풀고 화해하였다. 이날 알게 된 사실인데 나에 대한 J의 오해는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말을 잘못 전달한 직원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퇴사하기 며칠 전에 내 자리로 오기로 한 분이 오셨다. 나와 띠동갑 차이 나는 여 차장님이 오셨고 나는 업무를 인계하였다.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는 동안 느낀 건 확실히 경력에서 오는 짬밥과 업무 지식이 대단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의 일 처리하는 걸 보니 꼼꼼하게 하실 분 같았다. 나는 안심하고 퇴사 날만 기다렸다.
얼마 후 송별회 겸 차장님의 환영회를 곱창전골집에서 하게 되었다. 유의미한 자리라 대표님께서도 참석하였다. 그는 전골 국물에 소주를 몇 잔 들이켜시더니 직원들 다 있는 데서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다인아, 이젠 나갈 이유가 없지 않냐?”
“네?!”
“너 인마, 일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며. 여기 o차장님을 어렵게 모셔 왔으니까 밑에서 일 잘 배워봐. 알았지? 퇴사하지 말고!”
“아.....”
“어차피 우리 회사 몸집이 커져서 너 혼자 못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지금이 딱 시기라서 인원 충원하기로 한 거고, 그냥 다음 주 나오는 거다?!”
"......"
그러곤 대표님은 내가 긍정의 대답을 할 때까지 잔에 소주를 연거푸 따르시는 게 아닌가(그 당시 나는 소주가 잔에 채워지면 즉각 마셨기 때문에 내 잔은 늘 비어 있었다). 갑자기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 거절, 아니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차장님께 업무 인계를 하는 며칠 동안 실무적인 면에서 되려 배운 점이 많았다. 또한 성정도 따듯한 분 같아 ‘이런 분을 진작에 상사로 만났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였다. 혹시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나.
동료와 갈등도 잘 해결되었고 대표님 말씀대로 일을 가르쳐줄 상사도 생겨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더 이상 퇴사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날 하루 더 생각해 보고 답변을 드린다고 하였다. 내심 바로 다니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명색이 송별회 날에 퇴사를 번복하는 게 괜스레 민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