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여자

< The Leader> - 아날로그의 또 다른 소리

by giant mom

아이들이 어릴 때 소리 내어 책을 많이 읽어주었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나의 시아버지)와 그 아버지( 내 남편)는 귀가 어두운 편이서 항상 기계식 혹은 디지털식 소리를 매우 크게 틀어놓았다, 텔레비전 소리.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기계식 소리는 크게 들려온다. 이 소리를 오래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프다. 나란 사람이 소리에 많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최근 들어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늦은 시각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아버지의 발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올수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고 있었던 기억... 밤이 너무 싫어서 '하나님, 밤이 오지 않고 낮만 지속될 수 없나요?'라고 기도했던 기억... 밤마다 물건을 던지고 술에 찌들어 있는 목소리를 쉼 없이 들어야 하는, 때로는 그 소리에 뭐든 반응해야 한다는 강박증...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2009년 작 영화 <더 리더>(The leader)는 유대인 전범 재판을 배경으로 한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인 한나(케이트 윈슬렛 역)는 일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부역자로 가담한다. 그녀가 전범재판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당하는 것은 영화의 주요 서사다. 한나가 홀로코스트의 부역자가 되기 이전, 1958년 서독일의 노이슈타트에서 평범한 전차 검표원으로 일했을 당시, 우연한 계기로 그녀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남자 마이클(랄프 파인즈 역)이 이 영화의 중요한 정서 축을 감당한다.

10대의 마이클은 30대의 한나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고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책이란 인간의 인식과 사유가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물성을 지닌 도구이며 그 이상의 의미 세계다." 글랑블루 칼럼니스트가 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관한 이야기,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책 읽기'의 의미.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 그 이상인지, 이것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고2인 딸아이가 졸고 있는 나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나에게 그녀는 '책 읽어주는 여자'가 되었다. 아서 밀러의 희곡 <모두 내 아들>이었나? 그냥 그 소리가 위로가 되어, 난 더 달고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를 읽어주었고 난 한 시간 정도 잠을 자고 깼다. 사업을 구상하면서 이런 아날로그식의 소리들이 부활했으면 좋겠다. 어떤 식으로든 방법으로든.. 내가 경험한 이 행복한 순간을 느끼고 만끽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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