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토록 인정이 받고 싶었을까?
한국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물어봤다.
"너 회사에서 컴퓨터 카메라로 실시간 감시하니?"
"아니, 왜?"
"아니 그렇지 않은데 무슨 애가 중간에 화장실 한 번 가지를 않고 일을 하니?"
"그러게..."
헛헛한 웃음이 나왔다.
본사에서는 나라는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는데 말이다. 해외 지사의 어느 이름 없는 미생 주제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는 건지.
쉬어가며 일을 하라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잘 되지가 않았다. 에너지를 다해 집중하여 일을 하고 나면 언제 그런 에너지가 존재했냐는 듯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일이 끝나자마자 침대로 가서 불도 키지 않고 어두운 방에 누워 시퍼런 핸드폰 액정화면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뭘 봐도 즐겁지가 않고 뭘 먹어도 행복하지 않았다. 좋아했던 것, 취미, 운동은 이제 내 삶에서 없어졌다. 누구와 대화를 할 에너지도 능력도 사라졌다. 이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 내가 분명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득 매일 걷던 길이 낯설게 느껴지고, 매일 타던 지하철이, 매일 쓰던 단어들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출근길 중앙역, 프랑스 파리로 가는 기차를 보고 생각했다. 저 기차를 타로 그냥 확 떠나버리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다행히 그 기차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다. 아니, 살짝 했었을지도 모른다.
중국 상하이에서 일을 할 때 번아웃이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번아웃인 줄 몰랐었는데 나중에 돌이켜 보니 그랬었다. 상하이 소재 스웨덴 캐나다 회사에서 7년 남짓 마케팅 일을 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책도 한 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해외 직장 생활에 나도 모르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고, 상하이 생활 막판에는 번아웃이 와서 정말 힘든 나날을 보냈었다. 그래서인지 소중한 사람 - 남편을 만나고,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사는 것이 그리고 백수이자 전업주부로 사는 것이 정말 너무 좋았다. 내 주변 사람들과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한 달만 백수 생활을 하고 나면 분명히 너는 몸이 근질거려 일을 다시 하고 싶을 거라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놀고 놀고 또 놀아도 노는 건 좋았다.
그즈음 나는 브런치에 번아웃을 주제로 한 글을 쓰기도 했다. 글 제목은 이러했다.
"너무 열심히 살지 마세요."
나와 같은 아픔을 누군가 겪지 않기를 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적은 글이었다.
https://brunch.co.kr/@da3sseuli/30
오가며 종종 같은 고민을 하는 후배나 친구들에게도 마치 습관처럼 말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해. 그러니까 너무 열심히 살지 마. 그러다가 몸도 마음도 다 다칠 수 있다고."
그래놓고는,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이번에는 내 마음도 챙기면서 일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던 나였는데 또 열심히 살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번아웃이 와버린 것이다.
이는 분명 가면 증후군의 잘못된 결과였다.
가면 증후군:
Imposter Syndrome
한국어로는 가면 증후군, 또는 사기꾼 증후군.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얻어졌다 생각하고 지금껏 주변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심리이다. 성공의 요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 귀인(attribution)하고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 혹은 사기꾼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사기꾼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데, ‘임포스터(imposter)’는 사기꾼 또는 협잡꾼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이다.
1978년 미국 조지아 주립 대학의 클랜스와 임스는 이 증후군이 특히 성공한 여성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조사 결과, 그 여성들은 스스로가 똑똑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클랜스와 임스는 이 증후군을 가진 여성들에게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그 여성들은 자신이 운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지나친 성실성과 근면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나를 믿고 채용을 했는데, 나한테 실망하면 어떡하지?
내가 정말 과연 이 회사의 적임자일까? 나는 정말 괜찮은 직원일까?
나는 진짜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 성과가 과연 내가 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를 한없이 의심하고 깎아내렸고, 스스로를 자격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다.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하곤 했다. 나에게 월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칭찬 한 마디면 된다고. 이것이 반대로 나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돌아왔다. 인정과 칭찬에 나는 완벽하게 흔들렸다. 어떤 성과를 내어도 기쁘지 않았다. 대신 자책하고 눈치를 보았다. 스스로를 더 채찍질했다. 이전 회사에서 상사에게 칭찬을 듬뿍 받으며 일할 때는 힘들어도 매일이 즐겁고 에너지가 넘쳤다면, 이제는 일을 하고 좋은 성과를 내어도 기쁘지가 않고 공허해 지기만 했다. 직장생활 하루이틀 해 본 것도 아니고, 직장이 유치원 같이 '오구구- 잘했어요' 하며 칭찬 스티커 붙여 주는 곳이 아닌 줄 알면서도 왜 유독 그렇게 인정을 갈구했는지 모르겠다. '월급을 주고 일을 시키고, 그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곳이 직장이야. 누구한테 인정받는 것을 기대하면 안 돼.'라고 머릿속으로는 되뇌었지만, 허한 마음은 자꾸만 커져갔다.
치유되지 않은 감정들이 자욱히 남아 있는 나 자신을 이 글을 쓰면서 발견했다. 글을 쓰고 지우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내 마음이 점점 더 피폐해져가고 있는 것을 발겼했다. 괜찮아진 척 감추어 놓은 상처를 다시 꺼내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훨씬 더 많은 문장을 적었었다. 하지만 결국 다 비워내 버렸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는 어딘가 많이 이 빠진 듯한 그릇 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인과관계가 없는. 그럼에도 이 글을 여기까지만 적는 것은 어제오늘 성경에서 받은 말씀대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마 5:8) 그리고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 친절한 선과 실실함,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삶(갈 5:22) 을 살고 싶어서이다.
모든 상황은 양쪽의 의견을 들어보아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은 또 다를 터이다. 그 사람이 잘해 준 것도 있고, 고마운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덕분에 다양한 마케팅 이력을 쌓을 수도 있었고, 내 이력서에 ‘성공’을 나타내는 결과 수치들을 무수히 많이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부족하고 잘못한 것들이 분명 존재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어서 그 사람을 곤혹스럽게 했을 것도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이것은 누가 옳고 틀렸는지를 정할 수 없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논점만 불러오는 의미 없는 과거일 뿐이다.
이제는 그 사람과 당시 상황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도, 자책과 자기반성도 그만하려 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했다.
대신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내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일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위해 일했더라면 조금 더 마음이 편안했을 텐데.
남의 인정을 갈구하는 대신, 내가 나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오늘, 공식적인 회사 퇴사일에 나는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본다.
야, 너 똑똑히 들어.
너 일 진짜 잘했어.
마케팅으로 회사 매출이 얼마나 올랐는지 수치가 증명하잖아.
그거 네가 해낸 것 맞아.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책임감 있게 열심히 일 잘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아.
잘했어.
훌륭하다. 수고했다.
* 이 글은 주관적인 시각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의학적인 내용 등에 있어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거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