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봄이 나를 훔쳐갔다

by 꿈담은나현

밥솥에서 피어오른 김이 천천히 부엌을 채웠다. 새벽의 공기처럼 얇고 흐릿한 김은, 플라스틱 도시락 통을 채우는 내 손끝에도 스며들었다. 막내는 이불 속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었고, 아버지는 형광등을 끄라며 한마디 던졌다. 나는 대답 없이 국을 데우고, 고무장갑을 낀 채 그릇을 닦았다. 이 집에서 나는 이름보다 역할로 불리는 존재였다.


하늘이 너무 맑은 날엔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런 날이면 창밖 하늘에 걸린 희망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닿지 않는 그 무엇에 마음이 자꾸 걸려 있었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동화책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거절당하지 않는 이야기, 아무도 울지 않아도 되는 세계.


하지만 내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들어갔고, 기계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됐고, 꿈꿀 여유조차 사치였다. 합숙소는 눅눅했지만,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벽에 붙은 오래된 포스터를 보며 다시 쓰고 싶은 인생을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그곳에서 언니를 만났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웃음은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퇴근 후 편의점 앞에서 삼각김밥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하루를 털어냈다. 언니는 내 얘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에게 ‘함께’라는 감정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숨을 골랐고, 같은 공간에서 일했다. 언니는 종종 작은 물건을 내게 건넸다. 회사에서 쓰다 남은 펜, 스티커, 개봉하지 않은 립밤. “다 버릴 거라 아까워서”라고 말했지만, 손끝이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나는 의심 없이 받았고, 마음 한편이 간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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