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주한 마지막 페이지

by 꿈담은나현


마지막 장은 언제나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공백은 단순한 여백이 아니라, 두 사람이 끝내 닿지 못한 계절의 무덤이었다.


방 안은 반쯤 비워진 상자들로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흰 종이상자 틈에서 검은 옷소매와 빛바랜 스웨터가 흘러나왔고, 뽑혀 나간 못자리마다 작은 흉터가 벽을 파고들었다. 커튼은 바람에 흔들리며 자국을 스쳐 갔다. 오래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듯, 공기마저 저릿하게 떨렸다.


여자는 물건을 집어 들 때마다 오래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놓았다. 금이 간 머그잔, 구석에 뉘어 있던 담요, 그리고 멈춘 초침의 시계. 반대로 벽시계는 공허한 똑딱임을 울리고 있었다. 어떤 물건은 가볍게 봉투 속으로 떨어졌지만, 어떤 것은 심장을 찌르듯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추억은 모두 같지 않았다. 어떤 건 껍질처럼 벗겨졌고, 어떤 건 끝내 남아 무게가 되었다.


그중 하나가 앨범이었다. 표지는 희미한 하늘빛이었으나, 손때가 묻어 은은하게 잿빛으로 바래져서 있었다. 앨범을 꺼내는 순간, 낡은 종이가 서걱거리며 오래 닫아 두었던 상처가 다시 열리듯 바람을 갈랐다.


첫 장에는 두 사람이 서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하철역 앞, 황혼빛이 얼굴을 물들이던 저녁. 셀카 속 웃음은 아직 굳지 않은 봄날 같았다.


다음 장에는 백일 케이크. 작고 흰 초가 반쯤 녹아내리며, 불꽃은 두 그림자를 포개 놓았다. 웃음은 녹기 전의 설탕 결정처럼 반짝였고, 그 순간만큼은 영원할 것 같았다.


여름 장에는 바다가 있었다. 햇살은 파도 위에서 부서졌고, 그녀의 머리칼은 짠 내 어린 바람에 흩날렸다. 웃음소리가 사진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지만, 남자의 눈빛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꿈담은나현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꿈담은나현, 따뜻한 이야기를 담는 사람/ 소소한 순간을 기록하며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전합니다. 글이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온기가 되길 바랍니다.

6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4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8화거울에 남은 계절, 눈동자에 박힌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