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팀이 아닌 살아 있음으로

by 꿈담은나현

우리가 매일 버티며 살아가는 시간 속에도, 단 한 순간의 멈춤이 삶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는 유유자적하고 느릿한 강물 같았다. 흐름은 잔잔했고, 그 위에 햇살이 반짝이며 고요하게 나를 감쌌다. 커피잔에서 살포시 피어오르던 얇은 김, 창밖의 하늘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호사, 글 한 줄을 더 붙잡으며 시간을 늘어뜨리는 여유. 모든 것이 내 일상의 색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물들이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같은 하루인데도 이제는 회색의 파도처럼 몰려와 나를 삼키곤 한다. 업무와 일정이 쉼 없이 들이닥쳐 숨 돌릴 틈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순간들—투명한 물 한 잔, 화장실에 다녀오는 짧은 발걸음, 바람결에 흔들리는 커튼 소리—조차 내겐 커다란 쉼표처럼 다가온다. 짧은 틈마저 잃는다면 아마 나는 하루를 버티지 못할 것이다.


돌아보면 한동안은 ‘멈춤’의 시간이 내 삶을 채우고 있었다. 그 시간은 정지화면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흙 속에서 뿌리가 자라나듯 조용히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겉으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서서히 상처를 봉합하고 다시 일어날 기운을 길어 올렸다. 멈춤은 게으름이 아니라 숨겨진 성장의 색이었다. 검은 밤이 있어야 새벽이 빛나듯, 고요의 시간은 다음 장을 열 준비였다.


하지만 삶은 늘 한쪽만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은 ‘쌓임’의 시간이 무겁게 다가왔다. 해야 할 일들은 끝없이 겹겹이 포개지고, 계획과 약속은 빽빽하게 달력을 채운다. 하루는 흰 종이에 검은 잉크가 흘러넘치듯 빈틈없이 기록된다. 그렇게 바쁘게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깨달음은 차갑고, 때론 푸른빛 외로움처럼 스며든다. 그러나 버팀 또한 삶의 다른 얼굴이다.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겠다는 고집, 흔들려도 끝내 자신을 지켜내겠다는 다짐. 그것이 버팀이다. 버팀의 날들은 칠흑 같은 밤이지만, 그 안에서도 반짝이는 별빛 하나는 반드시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하루는 늘 감정의 빛깔을 달리한다. 기쁨은 맑은 하늘의 빛으로 스며들고, 분노는 검게 일렁이는 파도로 다가온다. 슬픔은 차가운 바람처럼 스쳐 가고, 즐거움은 봄날 꽃향기처럼 오래 남는다. 그 외에도 수많은 감정이 파도처럼 내 안에 밀려왔다가 사라진다. 이렇게 일곱 빛깔의 감정이 뒤섞이며 하루는 끊임없이 나를 흔든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는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힘이 있다. 타인을 향한 작은 배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 불쌍한 이를 향해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충동. 그것은 이성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피워내는 불씨 같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을 내며 나를 지탱하는 힘. 그 불씨 덕분에 나는 무수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바쁜 시간 속에서도 의식적으로 멈춤을 찾아내려 한다. 아침마다 끓는 주전자에서 들려오는 치익 소리, 그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점심 후 창가에 부서져 들어오는 노란 햇빛을 몇 초간 눈을 감고 느끼는 순간. 퇴근길에는 골목 담장을 물들이는 노을빛과 풀벌레 소리에 잠시 걸음을 늦춘다. 밤이 되면, 낡은 일기장에 단 두 줄이라도 써 내려가며 하루의 끝을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어둠에 몸을 맡긴 채, 심장이 고요히 뛰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 순간은 하루의 무게가 고요히 내려앉는 시간이고, 내일을 이어갈 마지막 숨결이다. 작은 멈춤은 이처럼 하루 곳곳에 숨어 있어,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쉽게 무너질 것이고, 그 덕분에 나는 또다시 일어설 수 있다. 멈춤은 쉼이자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멈춤과 쌓임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를 지탱하는 양 날개였다. 멈춤이 있었기에 다시 날아오를 힘을 얻었고, 쌓임이 있었기에 멈춤의 귀함을 알았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숨 가쁘게 쌓아가기만 하면 결국 소진되고, 멈추기만 하면 뿌리내릴 힘을 잃는다.


균형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내게 맞는 속도로 걷는 것, 사소한 순간에도 멈춰 숨을 고르는 것, 그리고 오늘 하루를 버틴 나를 다독이는 것에서 비롯된다. 붉게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을빛이 내 안에도 번지는 걸 느끼는 일. 창밖의 빗소리가 귓속을 두드리며 하루를 위로하는 일. 이런 작은 장면들이 균형의 다른 이름이다.


멈춤과 쌓임, 그리고 흔들리는 모든 감정이 결국 오늘의 나를 빚어낸다. 멈춤은 삶의 틈새에서 피어난 숨결이고, 쌓임은 그 숨결이 현실에 남긴 흔적이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내는 일은 늘 서툴고 어렵지만, 그 자체로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된다. 오늘의 나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작은 멈춤을 품고 묵직한 쌓임을 견디며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언젠가 이 시간이 지나 돌아볼 때, 나는 알게 될 것이다. 버티는 하루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루로 내가 살아왔음을.


버티는 하루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루로 나는 나를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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