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만, 나는 어디쯤일까

by 꿈담은나현


흐르는 시간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만, 그 안에서 멈춘 듯한 나는 지금 어디쯤일까.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이 제 속도를 잊은 듯, 잠시 서 있었다. 초침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같은 자리만 맴도는 진자처럼 보였다. 하얀 바탕 위 검은 바늘은 밤과 낮을 오가는 경계선 같았다. 빠르게 흘러간다고 믿었던 시간은, 그 순간만큼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달력에는 이미 몇 장의 종이가 뜯겨 나가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종이의 거친 결은 바람에 말라버린 낙엽의 촉감과 닮아 있었다. 넘길 때마다 바스락거림이 방 안에 퍼져, 흘려보낸 나날들이 내 어깨 위로 차곡차곡 내려앉는 듯했다. 잉크 냄새가 은근히 배어 있는 종이는 오래된 기억의 서랍을 여는 듯했다. 오늘을 표시한 작은 원 안에서도, 나는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거실에는 기다란 진자시계가 있었다. 똑딱, 똑딱 하는 소리는 낮에는 배경처럼 흘러갔지만, 밤이 되면 방 안의 숨결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시험공부하던 밤이면 초침 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와, 풀지 못한 문제와 함께 조급함을 키우곤 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재촉하는 듯해 귀를 막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시계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묵묵히 움직이고 있었다. 조급했던 건 시계가 아니라, 언제나 나였다.


창밖으로 스며든 가을 햇살은 잿빛 벽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경계에는 바람의 흔적이 출렁거렸다. 그 속에서 시곗바늘은 다시 묵묵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멈춰 있는 듯했다. 바람에 휘날리지 않는 낡은 표지판처럼 고정된 기분이었다. 눈길이 거울로 향하자, 오래된 사진처럼 바랜 얼굴이 나를 마주했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는데, 거울 속 나는 아직 그 자리에 갇혀 있는 듯했다.


밤이 되자, 방 안은 다시 시계의 영역이 되었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초침 소리가 정적 속에서 도드라지며, 작은 망치처럼 마음을 두드렸다. 똑딱거림은 내 심장박동과 엇갈리며 묘한 불협화를 만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소리를 따라가며, 내 삶이 어느 박자에 맞춰 흘러가고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때로는 그 소리가 안심되었고, 때로는 두려움이 되었다. 시간은 늘 같은 속도로 흐르지만, 내 마음의 속도는 언제나 달랐다.


계절 달력은 더 분명하게 시간을 드러냈다. 봄에는 활짝 핀 벚꽃, 여름에는 푸른 바다, 지금은 붉은 단풍이 달력을 물들이고 있었다. 사진 속 풍경은 바뀌었지만, 그 계절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계절은 순서대로 돌아왔는데, 나는 매번 같은 자리에 있던 걸까, 아니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걸까. 시계가 초를 세는 동안, 달력은 계절을 기록했다. 나는 순간을 놓치고 있었을까, 아니면 계절을 잃고 있었을까.


길 위에서 만나는 시계는 또 달랐다. 버스 정류장의 전광판 시계는 분 단위로 나를 재촉했고, 지하철역의 시계는 약속에 늦은 사람의 발걸음을 더 빠르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 시계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 다른 이는 같은 시계를 보며 하루의 끝을 정리했다. 똑같은 시계 앞에서 사람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풍경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나는 그들 틈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내 시간만 뒤처져 있는 듯한 묘한 고독을 느꼈다.


또래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누군가는 결혼 생활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아이의 성장 속도를 말하며 시간을 잰다. 그들의 시간표 속에서 나는 여전히 출발선에 머무른 듯했다. 그러나 곧 깨닫는다. 각자의 시계는 다르게 흐르고 있으며, 남들과 비교하는 순간 나의 박자는 엉키고 만다는 것을.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속도로 가고 있는가?’이지, 타인의 발자취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잠시 안쓰러움을 느꼈다. 흐른 시간에 비해 제자리에 서 있는 듯한 내 모습이 못내 서글펐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시계의 바늘이 멈춰 보인 것은 시간이 멈췄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달력의 빈칸은 허무의 기록이 아니라, 내가 다시 채워야 할 여백이라는 사실을. 멈춰 서 있는 듯한 나의 자리도, 결국은 다음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시간은 늘 흘러가고, 우리는 그 안에서 방향을 잃기도 하고 멈춘 듯 서 있기도 한다. 그러나 멈춤조차 의미 없는 정지가 아니라, 다시 걸어 나가기 위한 숨 고르기일지 모른다. 시곗바늘이 같은 자리를 도는 듯 보여도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듯, 우리 또한 조금 늦더라도 자신만의 속도로 걷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내가 내 걸음을 잃지 않는 일이다.


결국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그 안에서 나만의 속도를 찾아야 한다. 벽시계의 바늘은 여전히 움직이고, 달력의 빈칸도 내일의 페이지도 나를 기다린다.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묻는 순간마다, 마음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 안에서 작은 안도와 다짐이 동시에 피어난다.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지만, 내가 어디쯤 있는지는 결국 내가 정해야 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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