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서늘한, 그 밤의 모순

by 꿈담은나현

여름밤의 공기는 두 계절 사이에 걸린 숨결 같다. 낮의 뜨거움을 놓지 못하면서도, 서늘한 바람을 은근히 흘려보낸다. 모순된 공기 속에서 나는 아직 떠나지 못한 계절과 다가오는 계절을 동시에 안는다.


작년까지는 말복이 지나면 금세 달라졌다. 하늘은 푸르게 열리고, 저녁 바람엔 선선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매미 소리가 점점 잦아들면 ‘이제 여름이 저물어 가는구나.’ 하고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끈적하게 달라붙었고, 선풍기와 에어컨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다. 여름은 여전히 방 안 가득 눌러앉아, 쉽게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8월 말 결혼식을 위해 노란 트위드 원피스를 장만했다. 반팔이었지만 두꺼운 결은 바람을 거부했고, 안감은 열기를 가두었다. 옷은 화려했으나 피부 위에서는 작은 감옥처럼 달궈졌다. 옷을 입고 버스에 오르자, 차 안 가득한 에어컨 바람이 팔목을 타고 스며들었다. 순간, 다른 계절의 문이 열린 듯 시원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다시 도시의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공기는 장막처럼 내려앉아, 숨조차 가볍지 않았다.


발끝에서 낯선 소리가 났다. 신발의 밑창이 떨어져 나갔고, 굽은 감쪽같이 사라져 안이 훤히 드러났다. 허술해진 신발은 마치 오래 버티다 지쳐버린 누군가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어딘가 짠하면서도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너져 가는 신발과 뜨거운 숨결이 묘하게 어울리며, 계절도 사람도 모두 제 자리를 지키느라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밤이 되자 세상은 다른 얼굴을 내밀었다. 낮 동안 귀를 메웠던 매미의 울음은 사라지고, 풀벌레의 가느다란 합창이 어둠을 메웠다. 바람은 여전히 눅눅했지만, 그 속엔 은밀히 스며드는 서늘함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은 작은 벌레들을 불러 모으며 원을 그렸고, 빛의 테두리는 여름을 붙잡으려는 마지막 고리 같았다. 저 멀리 자동차 불빛이 스치듯 지나가며 어둠을 찢었다. 흘러가는 빛과 머무는 어둠이 부딪히는 경계에서, 계절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은 창문을 활짝 열고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장마 뒤 남은 흙냄새가 공기 속에 옅게 배어 있었고, 멀리서는 튀김 기름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눈을 감으니, 여름밤은 빛보다 냄새로 더 먼저 다가왔다. 습기 섞인 기운 속에 희미한 꽃향기가 스쳐 가고, 이내 모기약 냄새가 뒤엉켜 들어왔다. 창문 너머 가로등은 창백한 노란빛을 흘리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화려하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름밤의 모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뜨겁고 차갑고, 답답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숨결. 나는 그 앞에서 그저 숨만 고를 뿐이었다.


문득 어린 시절의 여름밤이 떠올랐다. 모기장 안에서 부채질 하던 어머니의 손길, 장마 뒤 흙냄새와 함께 밀려들던 눅눅한 공기, 멀리서 들려오던 아이스크림 트럭의 경쾌한 음악, 골목길 가로등 아래 모여 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때의 여름밤은 단순히 덥고 불편한 시간이 아니었다. 푸른 별빛과 노란 가로등빛, 방충망에 스치는 바람과 달콤한 수박 냄새가 한데 얽혀,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을 한 장면을 만들었다. 지금의 눅눅한 바람 속에서도 그 기억의 조각들이 불쑥 스며들어, 나를 웃게 하고 또 울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름밤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에는 설렘이었고, 청춘에는 자유였다. 친구들과 자정이 넘도록 걸으며 나눈 대화, 별빛 아래 흘리던 눈물, 새벽까지 이어진 웃음들. 모든 것이 여름밤의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여름밤은 조금 다르다. 나는 더 이상 무턱대고 길 위로 뛰쳐나가지 않는다. 대신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귀 기울인다. 떠나간 시절과 다가올 날들이 겹쳐 드는 순간, 나는 한 계절을 보내고 맞이하는 법을 배운다.


창밖을 내려다보면, 골목길 위에도 저마다의 여름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이의 웃음, 편의점 불빛 아래 모여 앉은 청춘들의 수다,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의 느린 발걸음까지. 서로 다른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이 뿜어내는 숨결이 같은 공기 속에 섞여 흘렀다. 여름밤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지쳐 있었고, 모든 순간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어우러졌다.


시계의 초침은 자정 가까이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밤은 언제나 그렇듯 더디게 흐르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한순간에 사라진다. 시간도 여름밤처럼 모순적이다. 끝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한다. 그래서일까. 초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랐다.


여름밤은 뜨거움과 서늘함이 교차하는 모순의 얼굴이다. 잠시 시원한 바람에 안도하다가도 다시 눅눅한 열기에 눌려 한숨을 내쉰다. 떠나지 못한 계절 앞에서 마음은 연약해지고, 동시에 서둘러 보내고 싶은 욕심이 자라난다. 붙잡고 싶은 마음과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한숨 사이에 교차한다.


어쩌면 모순은 삶과도 닮았다. 쉽게 식지 않는 기억과 이미 차갑게 식은 현실이 같은 공간에서 부딪히며 우리를 흔든다. 기쁨과 아쉬움, 위로와 불안, 욕망과 체념이 한데 얽혀 한숨처럼 흘러나온다. 그래서 여름밤을 걷다 보면 계절을 넘어, 결국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아직 여름은 끝나지 않았다. 창문을 열면 여전히 눅눅한 기운이 방 안으로 밀려든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가올 계절의 서늘한 숨결도 숨어 있다. 한 장의 계절이 넘겨질 때마다 문장도 얇게 넘어간다. 오늘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다음 문장을 준비한다. 뜨거움이 서늘함을 품듯, 끝맺음은 언제나 다음 시작을 감싸안는다. 당신도 오늘 밤 창문을 열어, 자신의 계절을 한 줄 더 써 내려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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