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가지 끝에서, 봄을 엿보다

by 꿈담은나현


얼어붙은 나뭇가지 끝에서 나는 봄의 비밀을 먼저 발견했다. 멀리서는 그저 허공을 긁는 그림자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가지 끝마다 작은 점들이 맺혀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 점들은 아직 이름조차 없는 새순이었다. 겨울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준비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작은 기척 앞에서 발걸음을 늦췄다.


안산천을 따라 걷는 길은 늘 익숙하지만,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다. 겨울의 강가는 흑백 사진 속 풍경처럼 고요하다. 그러나 고요 속에도 작은 리듬은 이어진다. 청둥오리 떼가 줄지어 흘러가며 푸른 잉크를 번지듯 수면을 흔들고, 노랑부리백로가 하얀 날개를 펴고 강물 속을 찌른다. 순간 번져 나간 파문은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공기 속에 퍼졌다.


둔덕 위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 위에 먹선처럼 곧게 서 있는 잡초들이 있었다. 끝자락은 얼음에 잠겨 투명하게 굳어 있었지만 줄기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서로 부딪히며 마른 음색을 냈다. 오래된 현악기의 떨림 같은 울림이 겨울의 숨은 노래처럼 번져 갔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묵묵히 버텨 낸 순간들, 내 안에서 조용히 쌓여 있던 인내들이 있었다. 잡초의 고집스러움이 마치 나의 흔적과도 겹쳤다. 겨울을 견디며 살아남은 작은 생명은 내 안의 희미한 빛을 비추었다. 그 빛이 발걸음을 다시 앞으로 내딛게 했다.


걷는 동안 풍경은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어제 단단히 얼어 있던 강가에는 가느다란 금이 가 있었다. 균열은 연약해 보였지만 계절이 남긴 메모였다. 글자 없이 새겨진 메시지, ‘곧 봄이 온다.’ 작은 틈새가 거대한 계절의 전환을 가장 먼저 알려주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조금씩 흘러가며 색을 바꾸고 있었다. 아침에는 잿빛으로 내려앉아 있던 하늘이 오후가 되자 은은한 금빛을 드리웠다. 강 표면은 그 빛을 받아 작은 파편처럼 반짝였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눈 위로 퍼졌고, 강아지의 발자국이 작은 별처럼 찍혀 갔다. 노부부의 그림자는 서로를 의지하듯 같은 속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발밑의 흙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작은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언 땅을 밀어내려는 씨앗의 호흡은 느리지만 끈질겼다. 마침내 연둣빛 새싹 하나가 땅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기다림 끝에 도착한 첫 대답 같았다.


나는 그 새싹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멈췄다. 여린 잎 하나가 차가운 공기 속에 선명히 서 있었다. 겨울 전체를 거슬러 올라와 선명히 빛나는 그 잎은 계절을 바꾸는 힘을 품고 있었다. 나는 내 기다림도 언젠가는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리라 믿어 보았다. 그 믿음이 나를 다시 앞으로 걸어가게 했다.


나뭇가지들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여전히 앙상한 뼈대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작은 원형의 망울이 맺혀 있었다. 비어 있다고 여겼던 자리는 사실 꽃과 잎을 위한 무대였다. 허전함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가지 끝의 빈자리는 어쩌면 지금의 나와도 닮아 있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내 안의 시간을 떠올렸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던 날들. 성과도 결실도 없는 듯 보였던 순간들. 그러나 그것은 멈춤이 아니라 준비였다. 씨앗이 뿌리를 뻗듯, 가지가 꽃을 위해 자리를 남겨 두듯, 내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채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석양이 강 위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은빛은 잿빛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어 풍경을 물들였다. 바람이 다시 불자 차가움 속에 묘하게 따스한 향이 섞여 왔다. 겨우내 얼어 있던 흙 내음이 조금 더 짙어졌고, 그 안에 어쩐지 새로운 계절의 기운이 배어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코끝으로 먼저 다가오는 봄의 조짐이었다.


나는 천을 따라 더 걸어 내려갔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고 가로등 불빛이 물 위에 흔들렸다. 불빛은 얼음 조각 위에서 반짝이며 작은 별 무리처럼 퍼져 있었다. 하루가 끝나 가고 있었지만, 끝자락에서 나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보았다. 겨울의 마무리는 곧 봄의 문턱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걸었다.


밤하늘에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올라 강물 위로 은빛 길을 만들었다. 바람은 낮보다 한층 차가워졌지만, 그 안에 스며든 흙 내음과 나무의 숨결은 낯설지 않았다. 강 위를 스치는 달빛은 겨울의 고요를 감싸며 묵묵히 봄을 예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눈으로 담으며, 길 위에서 계절만이 아니라 내 삶 또한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봄은 이미 겨울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잡초의 떨림, 씨앗의 숨결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기다림은 길고 혹독하지만, 그 안에는 연민이 자라고 올곧은 힘이 태어나며, 타인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고, 분별이 깃든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갈망까지도 모두 봄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봄을 기다린다는 건 단순히 계절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기다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기다려 주는 그 마음이 쌓일 때, 봄은 비로소 도착한다. 나는 오늘도 안산천을 걸으며 약속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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