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화려한 퇴장은 언제나 쓸쓸함을 품고 온다. 발끝에서 바스락 소리가 터졌다. 오래된 책장이 혼자 넘어가는 듯, 낡은 잎사귀가 작은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노랗게 바랜 잎맥은 햇살을 머금어 투명하게 빛났고, 바람은 그것을 쓸어 올려 허공에 던졌다. 순간 공기는 작은 무도회장이 되었고, 낙엽들은 서로 부딪히며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하늘은 어느새 깊게 파여 있었다. 여름의 잔열은 걷혀 가고, 눈부신 푸른빛이 차갑도록 맑게 번졌다. 그 아래, 나무들은 서서히 몸속의 빛깔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가지 끝에서 초록은 사라지고, 단풍은 불씨처럼 타올라 잎사귀마다 작은 불꽃을 피워냈다. 그것은 겨울을 견디기 위한 나무들의 은밀한 의식 같았다.
나는 길을 따라 걸으며 흩날리는 잎새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림은 작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소리는 오래된 편지를 찢는 듯도 하고, 손바닥 위에서 마른 종이가 갈라지는 듯도 했다. 잎 하나가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떨어질 때, 잠시 계절이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짧은 순간은 오래도록 내 마음 한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빛은 황금빛으로 기울었고, 공기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 길 위에서 오래전의 장면이 스쳤다. 그때도 이 길은 낙엽으로 가득했고, 바람 사이로 누군가의 웃음이 흘렀다.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바람에 남겨진 잔향은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움은 낙엽처럼 흩날리면서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이 계절이 주는 쓸쓸함이 슬픔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 늦게 배웠다. 낙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돌아가 또 다른 생명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된다. 스러짐이 끝이 아니라 순환의 일부라는 단순한 진리를, 나는 해마다 이 길목에서 다시 확인한다. 잃어버린 시간과 관계, 마음 한편의 공허까지도 언젠가는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한 준비였음을 계절이 알려주었다. 그것은 사라짐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시작의 얼굴이었다.
어릴 적 가을이면 가족과 함께 산에 오르곤 했다. 발밑에는 낙엽이 두껍게 깔려 있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림이 따라왔다. 아삐는 가끔 멈춰 서서 “이 소리가 좋지 않니?” 하고 웃었다. 그때는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은 그 소리가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위로였음을 안다. 산길을 내려오며 손에 꼭 쥐었던 작은 단풍잎은 아직도 오래된 책 사이에 눌려 있다. 세월은 빛을 바래게 만들었지만, 기억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
계절은 종종 비로써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유리창에 톡톡 맺히는 빗방울 소리 속에서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갔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쌓인 낙엽 위로 작은 파문이 번졌고, 그 물결은 흩어진 기억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 향에 기대어 있으면, 빗소리와 낙엽 냄새가 겹치며 계절의 깊이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사라져가는 것조차도 아름답게 보였다.
계절의 길목에서 나는 삶의 법칙을 배운다. 더 오래 살아내기 위해 나무가 영양분을 깊숙이 감추듯,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품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버림과 지킴 사이에서 선택하며, 때로는 잃어버려야만 끝내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밑에 쌓여가는 낙엽은 지나간 시간의 증거이자 다가올 계절을 위한 여백처럼 보였다. 쌓임과 사라짐이 교차하며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는 셈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자, 낙엽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금빛, 붉은빛, 갈색빛의 조각들이 허공을 채우며 눈앞에서 흩날렸다. 그것은 마치 가을이 마지막 힘을 다해 펼쳐 보이는 불꽃놀이 같았다. 그 장관 속에서 나는 계절이 얼마나 성대한 퇴장을 준비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화려한 끝맺음 뒤에 오는 겨울은 공허처럼 보이지만, 실은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침묵일 것이다.
해가 기울 무렵, 하늘은 붉은빛과 보랏빛 사이를 오갔다. 그 아래에서 낙엽들은 마지막 불꽃처럼 빛나며 흩날렸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리면서도 새로운 어둠을 맞이할 용기를 주었다. 노을빛에 잠긴 가로수들은 불타오르는 듯 선명했고, 풍경 속에서 나는 계절이 남긴 가장 화려한 장면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빛이 사라질수록 마음은 더 깊은 고요로 내려앉았다.
발끝에서 또 한 번 바스락 소리가 났다. 길을 따라 흩어진 낙엽은 나를 앞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계절이 내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고, 먼저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쓸쓸함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지만, 그 안에서도 오래도록 품어야 할 따뜻함이 있음을 이 길목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가을은 늘, 내 앞을 먼저 걸어간다. 나는 뒷모습을 따라가며 쓸쓸함 속에도 따뜻함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계절은 늘 흘러가고, 우리는 흐름 속에서 조금씩 잃고 또 채워간다. 마치 낙엽이 스러져 흙이 되고, 흙이 다시 봄을 키워내듯 우리의 하루 또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씨앗이 된다. 결국 계절은 흘러도, 우리가 품은 따뜻함만은 다음을 잇는 다리가 된다. 쓸쓸함을 껴안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다음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