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스럽게 달려드는 모기들. 습식 사우나에 들어온 듯한 더위. 주변 구석구석에 방치된 쓰레기에서 풍겨오는 악취들은 애써 손빨래하고 걸어놓은 옷에 배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내려놓은 마음을 시험하는 듯 고의적인 조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루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나의 공간. 오랜 재개발로 방치된 가건물 같은 월 10만 원짜리 반지하 쪽방에서 나는 미동도 않고 그 모든 것을 참아 내는 인내력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별로 인내하고 싶지 않아서 이태원 한 재즈클럽으로 번개를 쳤다. 대학로 쪽이 아닌 장소가 어색한 탓인지 이태원 가까이 산다는 한 명이 응답해 왔다.
"인생의 끝은 죽음이고 춤의 끝은 탱고라던데" 맥주 한 모금을 시원스레 마시고는 땅콩 하나를 입에 톡 털어놓으면서 오물거리는 모습이 다람쥐 같아 귀여워서 살짝 웃음이 났다.
"죽기 직전에 탱고를 만난 것 같은데 답답해 죽을 것 같네요. 그런데 그런 말은 어떻게 알아요?"
"네가 올린 탱고 글에 궁금해서 주변 춤추는 사람들 통해 좀 알아봤지" 선배가 보여 준 관심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선영 선배의 좋은 점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이런저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탱고에 대해 더 이상 특별히 묻지 않았고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라이브 연주는 말이 없어서 비워진 공간을 어색하지 않게 채워주고 있었고 우리는 조금씩 취해갔다. 연주도 공간도 까르르 잘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도 그 모든 것이 어제까지 견뎌야 하는 여름밤과는 달랐지만 인내력은 여전히 필요한 밤이기도 했다.
2차는 자신이 쏘겠다며 옮긴 곳은 그녀의 자취방. 발부터 씻고 싶어 하는 나에게 노란색 슬리퍼를 건네어 주었다. 마당의 공용수도에서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씻고 그녀의 쪼그마한 슬리퍼에 발가락 몇 개를 끼우고 뒷 꿈치를 들어 그녀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들어와" 문을 열고 수건을 건네는 그녀의 틈 사이로 보이는 방은 내가 사는 곳이랑 별 다를 것 없지만 그곳은 지하도 아니었고 악취가 아닌 향기가 스며 나왔다. 미리 차려놓은 것처럼 소주랑 집어 먹을 수 있는 안주거리가 자그마한 술상 위에 놓여 그녀가 특유의 활짝 웃음과 함께 나를 반겼다.
버너 위에서는 콩나물과 함께 라면이 끓여지고 있었다. "하나씩 끓여 먹는 게 맛있어" 공감한다. 라면은 배 고플 때 먹기도 하지만 허전함을 채우는 역할도 하는 것 같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마시면서 해장하는 거지" 콩나물과 함께 라면을 후루룩 입어 넣고 국물 한 모금 마시니 채워짐과 해장이 동시에 되는 것 같은 기분. 아, 행복. 그 순간 나는 행복이란 단어가 떠 올랐다. 이런 기분이 바로 행복이란 걸까? 오늘 처음 보는 이 모든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후르르" 라면 한입, "짠" 술 한잔 "꿀꺽" 국물 한 모금 "바사삭" 과자 한입마다 청량하게 웃는 그녀 때문일까? 인내력이 필요한 나의 공간에서 벗어나 향기로운 공간 속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안정감 때문일까?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오고 있었던 것 같고 계속 이대로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1999년 어느 한여름밤이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