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는 핑계고 !

by 섬세한 시골 의사

치과대학 입학 할 때 오리엔테이션으로 장기자랑을 한 적이 있다. 신입생들이 장기자랑을 해야 한다는데 나는 딱히 장기가 없었다. 동기들은 뭘 하나 봤다. 일종의 방송댄스를 연습하는 친구들, 개콘에 나오는 코너를 흉내 내는 녀석들도 있었다. 차력쇼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익숙하다. 이미 대학을 한 번 졸업한 적 있는 나는, 갓 신입생이었던 때가 떠올랐다. 춤추고 노래하고 콩트를 짜며 장기자랑 했던 모습들... 20년도 더 지난 얘기지만, 그때도 장기자랑을 뭘 해야 할지, 신입생들은 비상상황을 맞닥뜨린 것 마냥 허둥지둥 됐었다. 춤추는 친구들은 박자를 놓쳐가며 허우적거리고, 콩트 하는 친구들은 손발이 맞지 않아, 웃음 포인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렇게 삐그덕 거리는 모습들이 오히려 더 웃기고, 재밌있었을 것 같다.


다시 만나게 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이전 대학에서 겪었던, 장기자랑의 민망함은 겪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신입생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선배들보다도 많았다. 20대 후반에 입학했기 때문에, 나의 나이는 장기자랑을 채점하는 교수님들과 선배들 사이 그 언저리에 있었다. (OT를 참석하시는 교수님들은 대체로 젊은 교수님들인 것 같다)


나는 장기자랑 무대에서 뭘 할 것인가.

마이크 하나 들고, 스탠딩 코미디 같은 걸 했다. 스탠딩 코미디 특성상 누굴 비하하거나, 거친 단어들이 나와야 재미있는데, 교수님들과 어린 친구들이 이걸 받아 줄지가 의심스러웠지만, 인터넷에서 본 유머들 몇 개를 외워서 올라갔다.


주제는......


' 사랑에 관하여 !!! '


"여기 계신 교수님들을 제외하면, 신입생과 선배님들 다 통틀어도 제가 인생경험이 몇 년은 더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여러분들 사이에서, 제가 하나라도 더 나은 거라곤... 연애 경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은 제가 사랑에 관해 좀 지껄여 보겠습니다 ㅎㅎㅎㅎ 학번은 낮지만, 인생은 몇 년 더 선배일 테니 , 연애의 꿀팁을 알려드리지요 ㅎㅎㅎ"


연애에 서투른 치과대학 학생들은 귀가 쫑긋했을테고, 춤추고 노래하는 장기자랑의 연속이었던, 교수님들도 새로운 형태의 장기자랑에 호기심이 간 것 같다. 어떤 걸 말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 씨씨는 하지 마십시오. 아주 악질 중에 악질입니다. 씨씨가 되는 순간, 무기징역형을 받은 거라 보면 됩니다. 결국 후회한다 에 제 손모가지를 걸겠습니다. 여기 고개 끄덕이는 교수님 몇 분 계시네요 ㅋㅋㅋ "

" 그래도 해야겠다면, 몸도 마음도 피곤한 시험기간 막판에, 슬며시 손만 얹으면 됩니다. 정신 나가 있을 때가 기횝니다 ㅎㅎㅎ "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교수님들도, 학생들도 많이 웃었던 걸로 기억한다. 괴기한 분장 같은 걸로 민망한 사진이 찍힌 것도 없이, 관객(?)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았었다.


치과대학 내내 나는 씨씨를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한 말을 지켰다..... 가 아니라!

나는 이전 대학의 씨씨였던 후배와 결혼했다. (무기징역이라고 했잖아!!)


한 살 더 먹을 날이 멀지 않았다. 요즘 들어, 열심히 사랑하고, 하루하루가 새롭던 신입생 때의 청춘이 무척이나 그립다. 지금은 영포티라고 조롱당하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고 있는데, 영포티라고 놀림받고 있다. 그때는 그게 청춘인 줄 몰랐다. 늙은 것 같다. 주변에 어쩌다 한 번씩 만나게 되는 20대들을 보면, 마냥 귀엽고 부럽다. 나의 청춘은 이렇게 저물어버린 것인가.


' 그때가 그립다. 40대 늙은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그때도 청춘이었다. 영포티라고 조롱받아도 아무 상관없으니,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 내 청춘이여!'


...라고 후회하지 않게 , 지금의 40대를 재밌고, 알차게 살아야겠다! 어떻게 더 재밌게 살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해보자! 마음은 20대다. 아직 새파랗게 젊다 이 말이야!!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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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모가지가 아직 잘리지 않을 걸 보니.. 역시 씨씨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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