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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Oct 09. 2024

삶에 정답이 없어서 다행인데 가끔은 해설지라도 있었으면

스무 살, 새터 가는 길 버스에서 앞자리부터 차례로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던 날, 나는 스스로를 '잡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몰려와 다듬지 못한 채 와락 튀어나온 말이었고, 곧 당황해서는 흐지부지 문장을 매듭지었던 기억. 짧은 장기자랑도 함께 해야 했었어서 '뭉게구름'도 한 소절 부르고 앉았던 것 같다. 그날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의 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고, 아무런 생각을 않는 상태는 좀처럼 찾아오질 않는다. (아니 근데 퓨즈처럼 생각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있다고?) 그리고 최근에서야, 내가 하면서 사는 그 많고 많은 생각들 중 불안이 차지하는 공간이 꽤나 넓다는 걸 깨달았다. 자주 걸려 넘어지는 마음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내가 가진 불안감이라는 생각을 직관적으로 해본 적은 없었다. 올해 초 즈음 수비학을 공부하는 지인에게 타로를 볼 기회가 있었다. 평소 타로나 사주 같은 것에는 적당한 신뢰와 커다란 재미로 응하는 편인데, 그날은 어쩐지 낱낱이 파헤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닿아씨는 생각이 많아서 자기인지가 굉장히 뚜렷해요. 그리고 그만큼 불안도도 높은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들었고, 몰랐던 사실이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왜인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맞아, 나 꽤나 많이 불안해하면서 사는구나.


좋아하는 일을 내려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 좋아하는 일로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일에 대한 스스로의 애정과 일 덕에 받는 애정을 버무려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 동시에 그런 삶이 영영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 계속해서 원하는 방향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여지껏 금전적인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갑갑하다. 앞으로의 30대가 기대되면서도 뭐라도 더 일찍 만들어냈어야 하지 않나 싶어 조급해진다. 다정한 사람이 주위에 많다는 게 복되다가도 불특정한 공간의 날이 선 불특정다수를 겪을 때면 금세 무기력해진다. 속은 이리도 잘 부르트는데 주변에서는 곧잘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길 건네왔다. 단단하다, 평화로워 보인다, 꾸준하다.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람이고'만' 싶어했다. 그래서 몽울이 맺히는 불안을 잠으로, 운동으로, 술기운으로 잠재우는 요령만 늘었다. 그러다 방심했다 싶으면 금세 다시 영그는 말들에 뾰족하게 찔리는 것이다. '놓지 않았다고 해서 그걸 꾸준하다고 할 수 있는 거야? 일로 하고 싶은 거라면 더 매달려야 하지 않아? 조금 해보다가 힘들면 다른 일로, 다른 곳으로 도피하는 건 습관 아니야? 지금 같은 마음으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


뭉게구름마냥 몸을 키우는 불안에 걸맞지 않게 평화롭고 싶어하는 스스로를 인지하고 난 이후로는 종종 가만히 있다가도 순식간에 피로감에 짓눌린다. '왜 이걸 하고 있지? 나를, 내 이야기를 내보이는 일을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맞나? 누가 좋아해주지 않더라도 의미가 있나? 여기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뭘 할 수 있지? 나를 또 어떻게 팔아야 하지? 굳이 서울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같은 생각을 말없이 쫓다 보면 가끔은 여기서 눈 딱, 감은 채 삶이 멈춰버리는 편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진다. 사실 그냥 지금 같은 삶을 살면서 귀여운 할머니가 되어도 좋을 텐데. 당장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아서 지금에 만족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내려놓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제대로 이어나가질 못한다. 품에 넘치도록 끌어안은 것들을 떨어뜨릴까 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다리 아프도록 서있는 꼴이다.


교토에 와있는 지금은 눈만 돌려도, 집 안이든 밖이든 하루 중 평화로운 순간이 차고 넘친다. 선선해진 공기에 에너지는 배로 올랐다. 장을 보고 집에서 식사를 차려먹는 것도 낙, 출퇴근길 조금만 다른 길로 돌아 걸어도 금세 환기가 되는 것도 낙, 휴일에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다니다 새로운 크래프트 맥주를 만나는 것도 낙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볕 잘 드는 집에만 있다가 저무는 하루 역시 묘미다. 짧게 몸담다 떠날 것이 결정된 나에게 큰 기대나 부담을 지우지 않는 일터, 마음먹고 눈만 돌리면 쏟아지는 콘텐츠거리. 해낼 수 있는 게 천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지금 하고 있는 것들도 충분히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의욕이 사라진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해야 하는데'의 굴레에 혼자 자주 갇힌다. 필요 이상의 생각이 몰려오는 순간이라는 인지가 될 때면 곧 감정으로부터 달아나 빠져나온다. 하지만 또 정신 차려보면 제 발로 들어가 갇혀있는 순간이 허다하다. 이제부터 불안해해야지, 하고 불안해하는 게 아니니까. 나를 위한 시간을 마련해두고 그 시간에 뭔가를 하려다가 길이 새면 쉬는 시간이다, 싶어 비집고 들어오는 거니까. 그저 지나가는 생각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생각의 탈을 쓴 불안이 많았다는 걸 최근에서야 깨달은 거니까. 굳이 글로, 말로 형상화하지 않은 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을 뿐이지 적어도 열아홉 이후로는 쭉 이렇게 살아온 셈이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식대로 살겠다는 마음이 늘 불안과 버거움을 이기지만, 죽이는 것까지는 못해서 어르고 달래서 이고 지고 지내온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불안을 죽이는 방법은 모르고 살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서 선택하고 기꺼이 책임지는 삶을 원하니까.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것들은 대부분 변수 투성이니까. 변수는 곧잘 불안으로 이어지니까. 나는 사실 불안을 꽤 원동력으로 삼고 살기도 하니까. 그래도 피로감을 느껴버린 이상 이제는 이고 지고 살 필요까지는 없겠다 싶다. 두 팔 벌려 파도 타듯 불안을 타고 놀아봐도 되지 않을까? 못생긴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것 같다는 누구의 노래처럼, 불안한 사람들 중에 가장 낙관적인 사람이 되어보는 것도 좋겠다. 애초에 인생에 정답이 있더라도 그게 내 정답일 거라는 확신은 없잖아,라는 반골기질로 사는 중인데 어쩔 거야. 내 해설지는 내가 써야지. 차근차근 나만의 것들로 엮어내다 보면 정답 비스름한 한 권은 나오겠지. 그걸 사진첩 구경하듯 머릿속에서 꺼내보다 혼자 픽, 웃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퍽 귀여운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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