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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Mar 02. 2022

술이 뭐길래 이토록

술을 언제부터 좋아했던가. 생각해보면 확실히 스무 살은 아니다. 내가 처음 술을 마신 날은, 스무 살이 되고 친구들과 잡은 첫 술 약속에 나가려 채비하던 중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엄마 아빠와 대판 싸운, 그래서 친구들과 놀고 헤어져 그 길로 첫 가출을 해버린 날이다. 가출이라봤자 집에서 백오십 걸음 정도만 걸어가면 있던 친구 집에서 며칠 자고 온 것이 다였지만, 덕분에 처음 마신 술에 대한 기억이나 감흥은 크게 없는 것이다. 맥주였고, 맥스(max)였다는 것 정도만 기억한다.

학교를 다닐 때는 술자리가 재미있어서 끼고 싶은 마음에 술을 마셨다. 처음 갔던 MT인 이른바 '새터'는, 페트병 소주에도 빨간 뚜껑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곳이기도 했다. 맛은, 없어도 너무 없어서 감탄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람들은 궁금하고, 늦게까지 놀고 싶은 마음에 소주 한 잔 마다 물을 한 잔씩 들이키며 혀에 남은 소주 맛을 지웠다. 대부분의 술 게임에서 살아남은 덕에 급하게 마실 일도 없었고, 유독 분위기를 띄우거나 시끄러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리를 비워도 티가 안 났다. 그렇게 적당히 치고 빠지며(?) 동기들이 한 명 한 명 죽어나가는 걸 챙기면서 끝까지 놀았다. 그렇게 2박 3일을 놀고 왔더니 나는 선배들 사이에서 '14 최강'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조용히 강한 술꾼(?) 신입생이라기엔 술은  도무지 맛이 없었고, 그저 최대한 오래 놀고 싶었던  뿐이라서  억울했다. 그래도 소주를  째로  앞에 건네주는 친구들과 '최강'이라는 말이 웃겨  해명않고 두었다. 그렇게 학기가 끝나면 한동안 술을 마실 일도, 술이 생각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어쩌다 동네 친구를 만나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서 맥주를 마셔도, 탄산에 금방 속이 더부룩해져  캔을  비우질 못했다. 지금에야 맥주가 있는 곳이라면 그저 신나서 앉은자리에서  잔을 내리 비우지만, 그때는 그랬다. (맥주는 잔에 따라 마셔야 필요 이상의 탄산이 빠지면서 끝까지 배부르지 않게 즐길  있다.)


어떤 분야든 애정을 기반으로 하여 그곳에 깊숙히 들어가 있는 이들은 아무래도 멋져 보인다. 스물셋의 나에게는 동네 (이하 ''이라고 하겠다) 사장님이 그랬다. 자취생인데도 냉장고에 과일이  있을 정도로 과일을 좋아하지만, 과일 흉내를  과일향 음료는 좀처럼 취향이 못된다. 감자 튀김집의 과일(향) 맥주나, 과일에 이슬 같은 과일(향) 소주가 스무 살의 시작과 함께 꽤나 유행했지만, 나만은  유행을 꿋꿋이 비껴갔다. 그러다 칸에 처음  , 그곳에서 '생딸기 맥주'라는 메뉴를 보고 그동안 지녀온 신념이 흔들린 것이다. 생딸기라잖아, 생딸기. 딸기향이 아니라 진짜 딸기맛이 나니까 이런 이름을 당당하게 붙인  아냐? 메뉴에 맥주 종류가 이렇게나 많은데 이름 가지고 장난쳤을까 싶었다. 고민 끝에   감고 생딸기 맥주를 주문했고, 그렇게  음주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렸다. 맥주에서는 정말로 딸기 맛이 났다! 맥주를 양조하는 과정에서 생딸기를 넣어 함께 발효시킨 것이라 했다. 딸기 특유의  맛이 지배적이었고, 인공적인 단맛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연신 감탄을 내뱉는 나에게 사장님은  맥주가 마음에 든다면 '사워 에일', '람빅'이라 표기되어 있는 다른 맥주도 마셔보라며, 좋아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날을 시작으로 틈만 나면 칸에 놀러 갔다. 메뉴에 있는 온갖 '사워 에일' 마셔보았고, 흑맥주와 치즈케이크의 조합이 대단한 시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곳에서 배웠다. 마시면서 배우는  게임이라 했던가. 아니었다. 마시면서 배우는 맥주가 훨씬 재밌고 달았다.


그렇게 술자리보다 술이 좋아졌다. 맥주를 좋아하게 되면서 와인과 위스키에도 관심이 생겼다. 좋아하는 술이 생기니, 술에 있어서 내가 달가워하지 않는 맛이나 향이 무언지도 알게 됐다. 일례로 '술자리 좋아' 시절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마시던 소주의 알코올 향이나 막걸리의 누룩 향은 이제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특성이 되었다. 소주와 막걸리 역시 종류가 많아서 그중 입맛에 맞는 것도 왕왕 발견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몇 잔 마시다 보면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당긴다. 너무 달기만 한 술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과일맛을 낼 거면 과일 특유의 산미도 같이 가져가야 한다. 반주는 딱히 즐기지 않고, 별다른 안주 없이 마실 수 있는 술이 좋다. 대화나 몰입이 가장 좋은 술안주라 믿는다. 그렇게 차곡차곡 '술 취향' 이랄 것이 복잡하고 선명해질 때마다, 그리고 그 취향에 꼭 맞는 술을 알아갈 때마다 단어 그대로 '행복'하다. 전혀 모르던 맛이나 향을 경험하는 일도 즐겁다. 괜히 더 다채로운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든다. 모델 일을 시작하고, 여러 곳에서 파트타임을 해오며 만난 이들 중 결이 맞는 누군가 술까지 좋아하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지인들은 마트나 편의점에 가면 술 냉장고 사진을 찍어 보내며 추천을 부탁하고, 가까운 친구 중 몇은 나에게 물들어(?) 맥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애인이 생기는 일은 어찌 되었건 가장 가까운 친구가 생기는 일이라 생각해서, 상대가 이왕이면 나와 같은 술 취향을 가지기를 내심 바랐다. 운좋게 지금 연애에서 그 소망을 이루었다. 덕분에 가장 좋은 술친구가 생겼다.


술 마시는 유튜브를 시작한 지 햇수로 5년 째다. 원래는 이것저것 찍어 올리던 채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술 관련 영상만 남기고 모두 내렸다. 습관처럼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아서, 이왕 마실 거면 기록해 영상으로 남기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음주를 사랑하지만, 술로 인해 내 몸이나 하루가 장악당하는 건 싫다. 가끔은, 아니 사실 대부분 사랑이 시작되면 그에 어떤 자아라도 생긴 듯 내가 마음먹은 임계점을 가뿐히 넘어섰다. 사랑을 해야지, 보다 하게 되었다, 의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그리되면 나는 별수 없이 기존의 결심을 깨야하는 것은 물론, 어떤 맹세에 가까운 기대나 애틋함이 끈적하게 들어차는 걸 그저 관망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마음인 거 그로 인해 나중에 미끄러지든 베이든 간에 내 업보라 여기지만, 술만은 그런 종류의 사랑으로 여기고 싶지 않아서 매일 애를 쓴다.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같이 오래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술도 나도 서로로 인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든 과해서 좋을 게 없기도 하고, 나의 어떤 언행도 술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 않다. 그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술은 잘못이 없다, 사람이 잘못이지.'라는 말을 가치관이라도 되는 마냥 입에 올리고 사는 것이다. 물론 적당히 오른 취기는 여러 마음과 이야기의 다음을 좀 더 부드럽게 열어주고, 대화나 몰입의 좋은 촉매제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취기에 잡아먹히는 순간, 술의 탓을 하고 싶어지는 일들은 너무도 쉽게 벌어진다.

그래서 잔뜩 취해 얼큰해진 순간(이것도 어쩌다  번은 재밌다.)보다 맥주를 따르고  모금을 마시기만 하면 되는  직전의 순간이 좋다. 술로 인해 적당한 나른함이 몸을 감싸는 순간, 몸이 고된  좋아하는   모금에 눈이 맑아지는 기분을 훨씬 좋아하고 아낀다. 취하자, 죽자, 하며 술을 마시는 이들과 잔을 기울일 바에는 혼자 마시는  좋고, 나와 비슷한 마음의 애주가들에겐 둘도 없는 반가움을 느낀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에서 '끽연'이라는 단어를 마주했던 기억이 여태껏 생생하다. 단순히 습관처럼 흡연을 하는 것이 아닌, 행위를 하는 그 순간을 오롯이 만끽하는 것이다. 그렇게 습관의 단계에서 취향으로 단숨에 건너뛰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 진심이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생각보다 깊숙하고 넓다. 어느 때보다도 술 얘기를 할 때의 내 눈이 신나있는 것만 떠올려도,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내게 음주는 삶을 꾸리는 좋은 낙 중 큰 하나다. 좋아하는 것을 더 오래 건강히 곁에 두고 싶어서 운동을 하고, 과음을 피한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맛있는 맥주를 찾아다니고 싶으니까. 나도 '끽주'라는 걸 내 취미로, 취향으로 계속 두고 싶으니까. 그래서 마신다.


https://www.youtube.com/c/%EC%88%98%EC%A0%95%EB%B1%85%EC%9D%B4


저마다 술을 마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저 취미나 취향일 수도 있고, 날씨나 컨디션, 감정 같은 여러 요인이 한데 섞여 '오늘은 마셔야지' 만들어냈을 수도 있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누구는 하루를 얼른 마무리하려 술을 마시고, 누구는 하루를   붙잡고 싶어 술을 마신다.  둘이 함께 술을 마실 수도 있다. 어느 하나의 술자리에 양가적인 이유가 동시 존재할  있다는 사실이, 여러 극에 있는 감정이나 이유가 한데 머물러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순간이 나는 아무래도 매력적이고 재밌다. 당신은  술을 마실지 궁금하다.  마시면서 하는  얘기가 제일 재미있으니, 우선   꺼내오시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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