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했다

김동률 - 출발

by 김닿아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것이 아직도 조금 어색하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늦잠을 자도 뭐라하는 사람이 없고, 급하게 밤늦은 연락이 올 일도 없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 퇴사를 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어째 체감으로는 그보다 더 오래된 것 같은 기분. 요일감각이 벌써 사라졌다. 세상에, 금요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니. 여행이 끝나면 꼭 바로 다음 날부터 그 여행이 아득히 느껴지는 것 마냥, 출근을 하고 팀원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가고 하던 것들이 벌써 가물가물하다. 늘 친근한 척 반말부터 내뱉던 거래처와 매일같이 통화하던 것도 옛날 일 같기만 하다. 모르고 연락이 올 법도 한데, 퇴사날 바로 연락처 차단을 해두었던 것을 조금 전에서야 떠올랐다. 잘했다, 나 자신. 뭐 더이상 이 쪽 분야에 있지도 않을테니까. 나 편하자고 걷어내는 연락에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다.


회식을 할 수 없는 시기에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부풀려진 듯한 아쉬운 표정과 말들을 몇 번이고 술잔에 받아가며 정말로요, 저도 아쉬워요, 그동안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하죠, 같은 대답을 술자리 내내 했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이런 시기에도 장점은 있구나, 싶다. 생각해보면 퇴사할 즈음에는 재택근무도 많이 했었으니까. 덕분에 더 담백한 이별이 가능했다. 내내 가까이 지내던 민서님, 예은님과는 아쉬운 마음에 따로 저녁약속을 잡았다. 일만 아니면 걷어내고 싶은 관계들 속에서 그저 빛같던, 일과 별개로 남은 좋은 사람들이다. '번아웃증후군'이란 말을 검색창에 올리던 순간을 몇 번이고 알아채주던 사람들. 그들과 짬을 내어 서로를 챙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점심시간에 함께 산책을 하고, 야근을 할 때면 배달음식 내기를 하고, 종종 퇴근주를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들이 내가 지친 게 맞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더 너덜너덜해져서야 사직서를 썼을 것이다. 내가 오롯이 나일 수 없는 곳에서, 나를 면밀히 들여다봐주는 이들이 있었다는 게 참 복이었다.


오늘은 부지런히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춰서 책을 읽다가 올까 싶었는데, 눈을 뜨니 열한 시였고, 밀린 웹툰과 유튜브를 몰아보고나니 금세 여덟 시가 되었다. 오전에 과자 한 봉지 먹은 것 말고는 밥도 걸렀다는 걸 조금 전에야 알았다. 배달어플을 키려다가 순간 몰려오는 죄책감에 창을 닫았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마음이 순식간에 한심함으로 번졌다. 몇 번이고 엎어지려는 것을 어거지로 버티고 버티다 그만둔 거니까 이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과, 이렇게 생각없이 있다가는 그 간 해온 것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것이라는 불안. 워라밸은 도대체 누가 만든 단어인 걸까.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그걸 해내고 있다면 참 대단하다. 적당히 일을 하는 법도, 적당히 쉬는 법도 몰라서 늘 극과 극을 달린다. 천천히 쉬고 공부하면서 이직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이 그저 대책없는 투정으로 느껴지고, 더 버티지 못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는 순간에 펜을 잡았다.


우울감이 찾아오면 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은 움직임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 우울은 수용성이라 씻고 땀을 흘리면 대부분 사라진다는 것. 그것이 이내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나를 돕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욕심을 제대로 다루기 어려울 때는 버리는 편이 낫다. 욕심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멋모르고 앞서 달리는 욕심을 미워할 것. 철과 때를 모르는 욕심이 앞장을 서는 날은 꼭 화를 부른다. 그걸 미리 알고 내칠 줄 아는 것은 똑똑하다.' 좋아하는 웹툰에 들어있던 말이다. 아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이에는 자주 커다란 간극이 생기지만, 그래도 아는 것을 닮아가려는 중이다. 십오 분이라도 나가서 걷다 오는 습관이 생겼고, 유튜브를 보며 따라하는 운동도 곧잘 익숙해졌다. 생각과 몸을 쉬게 한 것을 자책하지 않고, 메모장을 열어 내일의 작은 계획부터 새로 세우기로 했다.


내일은 오랜만에 밥을 지어야겠다. 밥 짓는 냄새는 마음을 풀어주니까. 요리를 좋아하는 일은 과정을 사랑하는 일과도 같다는 말이 단박에 이해가 가는 순간. 따뜻한 차를 우린다. 참치캔을 따 물기를 짜내고, 김과 깨를 넣어 버무려 고명을 만든다. 따뜻한 오차즈케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누룽지를 남겨서 누룸밥도 해 먹어야지. 작은 일상의 계획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일은 꼭 카페에 가야지. 가서 책을 읽고 바깥 바람을 쐴 것이다. 카피라이팅에 대해서도 조금 더 찾아봐야겠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은 아니지만 내내 궁금해했던, 그리고 지금껏 해온 일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일이다. 그 일을 위해서 어떤 공부를 해야하는 지도 차근차근 고민해 볼 것이다. 그리고 곧 만날, 민서님과 예은님에게 줄 선물도 고민해볼 것. 마음이 차차 나아짐을 느낀다. 이렇게 나는 오늘 멋지게 우울에서 벗어났다.


https://youtu.be/iiAoQYNzoC8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 테니까

촉촉한 땅바닥, 앞서 간 발자국,

처음 보는 하늘, 그래도 낯익은 길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고

별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 길을 걸어가네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내가 자라고 정든 이 거리를

난 가끔 그리워하겠지만

이렇게 나는 떠나네, 더 넓은 세상으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