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인쇄는 총 6번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했다. 제목을 정하지 않은 채로, 글은 계속 수정 중이어서 마땅한 표지도 없었다. 그래도 샘플 인쇄도 하나의 기회니까, 매번 다르게 만들어봤다. 대개 인쇄소에 넘기기 전 후다닥 그린 그림을 얹어서 완성했다. 때론 이런 후다닥의 상황에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1. 내 맘대로 살 거야 말리지 마
1차 제목은 친구가 추천해준 노래 가사로 정했다. 요즘 듣고 있는 노래에서 가장 숨이 트이는 부분이라고 말해줬다. 나도 같은 노래를 들었건만 저 부분이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곱씹어볼수록 당차 보여서 1차 제목으로 선정했다.
이 제목으로 1차 샘플 인쇄를 해오자, 선생님은 물개 박수를 쳐주셨다. 드디어 내가 내 목소리를 내는가 싶어 감격하셨단다!
제 친구가 추천해준 건데요? 그래도 그걸 고른 건 본인이잖아요! 아 그렇네요! 짝짝짝.
표지 그림은 파워 포즈로 알려진,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당당한 자세로 한껏 당참을 뽐냈다. 전 글에 등장한 바로 그 친구다! 친언니는 1차 샘플본 표지를 보고 학급문고, 관공서 공보 같다고 평했다. 날카로운 평가였다.
1차본. 스노우 250. 코팅없음.
2. 나의 휴휴기
내가 가진 시기는 일종의 갭이어 gap year면서, 안식년이라는 생각과 이미 이름 지어진 용어 대신 나만의 용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휴휴기라고 지었다. 쉬고 또 쉰다는 의미다. 갭이어와 안식년보다도 청년세대가 자유롭게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고 질문하고, 본인이 속한 곳에서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시기를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개념이 필요하다. 교수님의 안식년이 아닌, 외국 학생들의 갭이어가 아닌 우리의 휴휴기.
역시 이에 맞는 그림을 새로 그렸다. 쉴 휴, 두 글자를 양 팔에 팔짱 끼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2차본. 스노우 250. 무광코팅.
3. 내가 허락한 갭이어
이번에는 휴휴기에 대한 평이 분분해서 좀 더 일반적인 갭이어라는 용어로 다시 단장했다. 이번엔 내 그림 중 많은 분들이 좋아해줬던 밤하늘의 별, 커넥팅 닷으로 꾸며봤다. 하지만 셋 중 어느 것도 마음에 팍 들지는 않았다.
3차본. 랑데뷰 내추럴 210. 코팅없음.
4. 궤도 밖의 삶
점점 제목을 확정 지을 때가 다가왔다. 제목이 없으니 글을 확 휘어잡는 중심 축대가 없는 데다, 쓰는 입장에서도 글이 느슨해졌다.
일단 제목은, 요즘 유행하는 문장형이 아닌 클래식한 명사형으로 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 시대가 흘러도 사랑받는 건 클래식,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나의 글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담은 제목이 묵직하게 버텨주기를 바랐다. 제목과 글이 찰싹 달라붙어서 제목을 보고 선택하는 독자들에게 혼동이 없기를 바랐다.
1. 문장형이 아닐 것 2. 글을 관통하는 키워드
답답한 마음에 소제목들을 들춰봤다. 그러다가 ‘책속의궤도밖의삶’이라는 장을 발견한다. 나는 줄곧 궤도에 비유해서 말하곤 했다. ‘궤도에 올랐다, 궤도를 벗어났다.’ 내 글을 포괄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궤도다. 시작하는 첫 글이었던 '인공위성의 궤도'와도 일맥상통한다. 궤도라는 씨줄을 대자 글들이 날줄이 되어 촘촘히 얽힌다.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는 ‘궤도’였다. 공부를 하던 하나의 뚜렷한 길도 궤도였고, 너무나 익숙해서 늘 반복되는 하루도 궤도였다. 드디어 알아챘다.
4차본. 랑데뷰 내추럴 210. 무광코팅.
5차본. 띤또레또 백색 250.
최종 인쇄본은, 공부쟁이를 추가해서 <공부쟁이의 궤도 밖의 삶>으로 확정했다. 내가 돌던 궤도는 어떤 궤도였나, 공부쟁이의 궤도였다. 공부쟁이가 들어가야 나를 더욱 잘설명한다. 모범생은 너무 바른 이미지인데, 나는 모범적이려고 한 게 아니고 그저 공부가 즐거웠을 뿐이다. 내게 공부쟁이의 의미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이다.그런 의미를 담았다. 물론 공부를 오래 한 모범생을 포괄한다.
표지 그림은 궤도를 표현할 수 있는 우주 색을 배경으로, 발사체에 올라탄 나를 그렸다. 첫 글의 포부처럼 나는 스스로를 인공위성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발사체에 올라타 궤도 바깥으로 이동한다.
표지를 확정 지을 때도, 디자인이 다른 다섯 가지 버전으로 시험 인쇄했다. 그중에는 이 그림과 완전히 다른 백색 배경에 오밀조밀한 그림도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나는 그 버전으로 가고 싶었는데, 나를 제외한 분들이 한 목소리로 이 남색 버전을 좋아해 주셨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됐다. 이 그림이 책 내용을 잘 포괄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럴 땐, 초심으로 돌아간다. 단순하게. 이 그림은 궤도와 함께, 로켓과 화살표를 통해 바깥으로 나아감을 묘사하고 있다. 단순하지만 포괄하는 그림이다.
내가 고집했던 표지는, 본문의 이야기들을 그림에 픽토그램으로 표현한 것이었는데 책을 읽고 난 후에 복선처럼 그 그림의 의미가 보이도록 시선의 동선을 짜고 싶었다. 그런 깨알 같은 재미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제목과는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아서, 고민 끝에 현재의 버전을 선택했고, 이 결정이 옳았다고 본다.
3월 30일 아주 맘에 드는 초판본
표지는 종이재질과코팅 여부를 고르면 된다. 선호했던 띤또레또 백색 종이는 매력이 우둘투둘한 질감인데, 코팅을 하면 감촉이 사라진 다기에 5번째 샘플은 코팅 없이 진행했다. 그런데 책을 자주 펼쳐보면서 수정하다 보니 책날개가 찢어지고, 손 때가 타는 등 오염됐다. 혹시라도 물에 젖을 수도 있으니 보관이 용이하도록 코팅을 했다. 빛에 번쩍이는 유광 코팅보다 반사가 적은 무광코팅을 선호해서무광코팅으로 진행했다.
종이 재질은, 남색 배경색을 비롯해 내가 사용한 그림의 원색들이 탁하지 않고 선명하게 표현되기를 바라서, 인쇄소 직원분과 상의하고 몽블랑으로 결정했다.시범 인쇄 없이 주문했는데, 결과물을 보자마자 직원분의 조언을 듣길 잘했다고 감탄했다. 내가 딱 생각하던 색이 나왔다! 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