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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May 03. 2021

나의 아버지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12월, 우리 아버지는 태어나셨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고, 평양을 점령하고, 빠르게 북진하다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다시 후퇴를 거듭해서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급박한 시기였다. 당시 우리 가족의 상황도 꺼져가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던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은 삶의 터전을 다 포기하고, 어렵겠지만, 내 나라에서 밝은 미래를 일궈보자는 희망과 기대를 안고,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일본을 잘 알고 있는 할아버지는 일본과 부산을 오가며, 화장품등을 팔았는데,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되어서 돈도 제법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뇌출혈로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시면서, 우리 가족은 정말 금방 무일푼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집도 없어서, 깡통을 잘라서 편 다음, 이어 붙여 지붕을 만들고, 장대를 기둥 삼아 남의 집 담벼락에 기대어 움막을 짓고 살았다. 아버지는 학창시절 신발이 없어서 남이 버린 군용 워커를 주워서 신으셨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버지는 열심히 공부하셨다. 


당시는 고교 평준화가 되기 전이라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큰 자랑이었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최고 명문 고등학교인 K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합격 소식을 전하자, 뇌출혈로 거동을 못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자리를 더듬어 억지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어디 있냐, 내 아들 한 번 안아 보자.”라고 말하며, 소리 내어 우셨다고 한다. 


그런 할아버지 때문인지, 아버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아버지는 너무 가난해서, 경제적으로 차이가 많이 났었던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난 때문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병도 생겨서 대학 공부도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돈이 없었던 것이 한이 되어서, 인생의 목표 자체를 돈으로 정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의사가 되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결혼을 한 이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79년 즈음해서, 의사들이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바로 낙태 수술 이었다. 군사정권 시절, 억압된 사회 분위기, 그리고 여전히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 결혼 안 한 여자가 임심을 하면, 낙태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남아선호 사상이 아직 팽배했었고, 둘도 많다는 구호 아래, 다자녀를 죄악시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아를 선별 낙태하는 일이 많았다. 


암암리에 행해지던 일이라, 수술비도 굉장히 비쌌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수술은 하지 않으셨다. 어린 시절에 단호히 거절하시는 것을 나도 직접 보았다. 당연한 일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낙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1987년에야 태아성감별이 불법이 되었고, 2009년 이전까지 임신 28주 이내는 법적으로 낙태가 허용되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너는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데 성적이 왜 이 모양이냐?, 도대체 밥 먹이고, 옷 사주고, 공부 시켜주는데, 용돈이 왜 필요하냐? 등등의 말을 들으면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마음에 상처받는 일도 많았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충분히 있으셨다. 내가 이해심이 모자랐던 것이었다. 


 세월은 많이 흘러서 이제 아버지께서는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되셨다. 일흔이 넘으셨지만 지금도 보건소 진료의사로 일하고 계신다.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 의료용 보호구를 착용하고, 환자들을 진료하고, 휴일에도 비상대기, 근무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서, 몇 번 건강식품도 사 드렸다.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설 연휴에도 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한다. 고향, 친지 방문 자제라는 코로나 방역수칙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지만, 매일 코로나 환자나 밀접 접촉자를 마주하는 아버지의 직업 특성 때문에, 손녀들을 아예 안 만나려고 하신다. 정 일이 있으면, 코로나 기세가 덜할 때, 나 혼자만 잠시 찾아뵈었었다. 이러다가 아직 많이 어린 우리 둘째는 할아버지를 기억 못 할까봐 걱정이 된다.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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