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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Feb 11. 2021

왕초보, 주말농장 이야기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회사에서 사원 복지의 일환으로 오래전부터 주말농장을 운영하였다. 도시에서 자랐고, 당연히 농사를 지어본 경험도 없기 때문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주말 농장 경험이 있는 회사 동료의 권유로 얼떨결에 신청해 버렸다.


원자가 많아서 추첨을 하였는데, 회사 동료는 떨어지고, 나는 당첨이 되었다. 솔직히 그 동료 하나만 믿고 시작한 일인데 막막하고,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재미삼아 한 번 해보라는 아내의 말에 책도 사서 보고, 자료도 찾아봤는데 어떻게 해 나가야 할 지 막막하기는 매 한 가지였다. 아무튼 ‘대강 상추, 고추 정도만 심어보자.’고 잠정적으로 마음을 정하고, 주말에 밭에 나가보았다.


아내와 다섯 살, 그리고 이제 막 100일 된 두 딸과 함께 가 보았는데 정말 소풍 가는 기분으로 나갔던 것 같다.


고구마에 대한 몇 페이지만 죽어라 읽었다.


 주말 농장은 4월 중순부터 시작이었는데,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2주 정도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그 날 밭에 도착해보니 이미 바지런하게 정돈된 밭에 모종까지 심어 놓은 사람들도 많았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기 밭에서 흙 고르고, 거름 뿌리고, 두둑 쌓고, 멀칭을 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그냥 멀뚱히 있기 어색해서 삽과 괭이를 들고, 나도 밭을 파 뒤집어 보았다. 한 두 삽 정도 땅을 파보고는, 이 정도만 할 만하다고 느꼈는지 갑자기 자신감이 붙어서 팔을 걷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주말 농장 전경


7평 밭을 나 혼자 다 고르고, 두둑을 쌓는데 3시간이 걸렸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고, 청바지에 러닝화, 긴 팔 옷을 입고 나온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입에서 저절로 험한 말이 맴돌았다.


거름은 뿌리지도 못했다. 주말농장이라고 해서 아이들과 손잡고 나와서 꽃삽이랑 분재용 물뿌리개로 농사 짓는 것을 상상했는데, 나는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말농장을 재미있는 모래 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졸망졸망 따라온 첫째 아이는 꽃삽을 가지고 땅을 몇 번 뒤집다가, 지렁이, 쥐며느리가 기어 나오고, 흙에 섞인 거름 덩어리를 부수다가 역한 냄새가 나자 황망하게 나를 몇 번 올려 보더니 화가 났는지, 엄마에게 달려가서 매달리더니, 결국 핸드폰을 얻어내어 나무 그늘 한 구석에서 색칠하기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둘째 아이를 업은 상태에서 그래도 내가 안스러운지 아내는 뭐 도와줄 일 없느냐고 물어봤는데, 나는 너무 힘들어서 그냥 저리 가라는 뜻으로 손만 휘휘 내저었다. 내가 계획성 없이 덤벼들어서 생긴 일인데 괜히 아내에게 나쁘게 대한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미안하다.


땅을 고르면서 어떻게 할 지 고민해 보았는데, 상추, 고추 다 자신이 없고, 책에서 읽은 것 중에 게으름뱅이 농사라고 하는 가장 쉽다는 고구마 농사에 올인하기로 결정해 버렸다. 책에서 고구마 보다 더 쉬운 작물이 있다고 했으면, 나는 그 작물을 심었을 것이다. 그게 뭐든. 솔직히 거름 뿌리는 것을 깜빡하고, 두둑을 다 쌓아버려서 거름을 주고, 다시 두둑을 쌓을 엄두가 안 나서, 거름이 필요 없는 고구마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두둑은 길게 딱 세 줄로 쌓았다. 정말 몇 번씩 확인하면서 했는데도 삐뚤게 되었고, 왼쪽 두둑은 너비가 좀 부족해 보였다. 그래도 검정 비닐로 멀칭을 해 두니 일단은 그럴 듯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실수한 것이 있는데, 밭을 뒤집어 엎은 다음, 며칠 정도 그대로 두어 햇볕에 쪼여서 살균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바로 멀칭을 해 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그럴 만한 경황이 없었다.


멀칭을 지금 하지 않으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기껏 쌓은 두둑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너무 힘들어서 다음에 또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싶지 않았던 것도 이유이기는 하다.  


두둑을 쌓은 모습과 멀칠을 한 후


그 날 손에는 물집이 한 가득 잡혔고, 팔, 허리, 허벅지가 쑤셔서 다음날까지 제대로 걷는 것도 힘들었다. 아무튼 고구마 순을 인터넷으로 주문하였다. 베니하루카로 결정하였는데, 무엇보다 활착이 잘 되고, 튼튼한 품종이라는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고구마 순이 전남 해남에서 우리집까지 배송되는데 이틀이 걸렸고, 도착한 날이 수요일이었다. 평일에는 회사일 때문에 농장에 갈 수가 없는데 토요일까지 고구마 순이 안 죽고 버텨줄 지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걱정되는게 하나 더 있었는데, 최소 단위로 샀는데도 고구마 순이 300개는 넘었던 것 같다. 7평 밭에 심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이었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주말농장 실패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딱히 열심히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기에,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커다란 비닐봉지에 고구마 순을 다 넣고 분무기로 물을 뿌린 다음 베란다 그늘진 곳에 놓아 두었다.


며칠이 지나고, 토요일 오전에 비닐봉지를 열어 보았더니, 오히려 처음 봤을 때 보다 더 상태가 좋았다. 잎 색깔도 선명하고, 줄기에 하얗고, 앙증맞은 흰 뿌리가 마치 아기가 손가락을 펼치듯이 자라나와 있는 것들도 상당 수 있었다. 솔직히 많이 놀랐다.


고구마 순의 강인한 생명력을 처음 목격하였고, 어쩌면 내가 서투르고, 몇 가지 실수를 하더라도, 잘 자라서 나중에 수확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닐봉투를 열어본 순간 그런 희망이 생겨났고, 갑자기 천국만마를 얻은 듯 용기가 샘솟았다.  


그 날 주말농장에 혼자 가서, 고구마 순을 심었는데, 핸드폰으로 고구마 순 심는 동영상을 보면서 하나씩 따라 심었다. 고구마 호미를 사용하니 심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손에 익지 않는 일이다 보니 동영상처럼 말끔하게 심겨지지 않았다.


어쩔 때는 너무 깊이 심는 것 같고, 어쩔 때는 너무 얕게 심는 것 같고, 솔직히 단 하나도 맘에 들게 심지 못했던 것 같다. 잘 몰라서 잎 뒷면이 하늘을 향하도록 심은 것도 제법 있었다. 일을 마치고 밭을 내려 보니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안 그래도 삐뚤 하였던 두둑은 한 번 더 손을 타는 바람에 더 삐뚤어졌고, 고구마 순들은 정말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힘없이 땅에 꼬꾸라져 있었다. 고구마가 아니라 꼭 콩나물을 심어 놓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전에 두둑을 쌓았을 때는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어서 SNS에 올리기도 하였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사진조차 찍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내 밭을 본다면 비웃을 것 같아서 부끄러웠고, 빨리 집에 돌아가 버렸다.


사실 사진을 찍고, 찍은 사실을 잊었다. 엉망이 된 고구마 순들


힘없이 늘어진 고구마 순을 보며, 첫째딸이 불쌍하게 보고 있다.


그때도 덥고 너무 힘들어서 그냥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그냥 왔는데, 한 주 후 다시 밭에 가보니 잘못 심어 둔 고구마 순은 알아서 줄기를 비틀어 방향을 바로잡고 자라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둘째가 몸 뒤집기 연습을 하던 때라 그런지, 감정이입이 되어 버려서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렇게 한 주 전에 보기 싫었던 콩나물 같았던 고구마 순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며, 나의 악함과 무지에 대한 반성과 고구마 순의 열정과 순수함을 칭찬하며, 열심히 물을 주고, 북주기도 하고, 주변정리도 하였다. 그 날 이후 나는 고구마와 우리만 이해할 수 있는 애착관계가 형성되어 버렸다. 삼 열로 늘어선 고구마 순 하나하나에 번호도 정해주고, 몇몇 특이하게 생긴 것들은 별명도 지어 주었다. 길쭉이, 튼튼이, 꼬마 등등.


차례대로 튼튼이, 길쭉이, 꼬마, 같은 날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걱정과 다르게 심어 둔 모든 순이 100% 다 살아나서, 고구마 순이 너무 많이 남아 버렸다. 심고 남은 순은 다시 비닐에 넣어서 일주일을 보관했는데, 그래도 꽤나 상태가 좋았다. 햇빛을 못 봐서 잎이 바래진 것들이 조금씩 있었지만, 심기만 하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상태였다. 다른 주말 농장주들에게 홍보도 하고, 떠 넘기기도 하여, 가급적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너무 숫자가 많아서 아깝지만 상당수는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삼 주 정도 지나자 어느덧 줄기도 제법 뻗어가고, 이제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더니, 주위에 잡초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5월, 6월은 정말 잡초와 계속 싸움을 벌였다. 회사일 때문에 주말에만 밭에 와서 뽑고, 다음주에 오면 또, 똑같이 잡초가 자라 있는 모습을 보고, 정말 사생결단을 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잡초를 뽑았다. 일이 서툴러서 잡초에 팔 다리가 베이고, 여전히 손에 물집이 잡히는 날도 있었다.


보통 이 정도로 잡초를 정리해 주면 된다.


이때쯤 슬슬 하나 두 개씩 장비를 사기 시작했다. 모자, 토시, 장화, 장갑, 호미 등등, 그래도 한 번 주말농장에 갈 때마다 서너 시간은 노동을 하는데 뭐가 하나라도 불편한 구석이 있으면 정말로 짜증이 나서 일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농사 짓기에 딱 맞는 모자, 장화부터 샀고, 호미는 맨 마지막에 산 것 같다.


 주말 농장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호미가 여러 개 있었지만 상태가 안 좋은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호미 자루의 갈라진 나무 틈새로 손가죽이 끼어서 비명을 지른 이후 바로 구매하였다.


새로 산 호미 덕분에 일 능률은 올라갔지만, 이번에도 작은 실수를 한 것이 있었다. 호미 자루는 녹색, 호미 날은 검정색이었는데 이게 밭에 한 번 내려 놓으면, 녹색 잎과 검정 비닐 멀칭에 섞여서 찾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것만 제외하고는 나에게 딱 맞는 호미였다.


 

문제의 호미


아무튼 이렇게 하나 둘 사 모았더니 차 트렁크에 제법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고, 어쩌다 아내가 차 트렁크를 열어보고는 농사꾼 다 되었다고 깔깔거리며 놀리기도 하였다.


6월에는 비가 자주 와서 많이 편했다. 잡초 뽑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손에 익었고,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비가 오면, 주말에 물을 안 줘도 되었는데, 신기하게 금요일 정도에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항상 주말 일기예보를 보고, 비소식이 있으면 마음 편하게 한 주를 보낼 수 있었다.


만약 비가 제때 내려주지 않았다면, 무더위에 매번 밭에 물 주느라 꽤나 고생을 하였을 것이다. 농사는 반은 하늘이 짓는다고 하는데, 옛 사람 말 중에 틀린 말이 없는 것 같다.


7월이 되자 고구마 줄기가 덩굴을 이뤄 이제는 잡초가 많이 자라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밭 가장자리의 풀들은 전부 낫으로 잘라줘야만 하였다. 뽑지 않고 자르기만 하니, 그냥 현상유지 정도 밖에 안 되었다. 이 즈음에 고구마 밭에 메뚜기, 방아깨비 등등 곤충들이 너무 많아져서, 고구마 잎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다.

 

잎이 뜷렸다!


아마존 정글 속에서 갖가지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니듯, 고구마 잎 위로, 줄기 사이로 뛰어다니는 곤충들을 볼 때마다 농약을 칠까 고민해 보았는데, 우리 가족이 나중에 먹을 것이고, 어차피 취미로 하는 건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소주에 마늘 즙을 타서 뿌려보았는데, 제법 효과가 있었다. 7평 밭이라 가정에서 쓰는 분무기 하나 정도의 양이면 한 번 뿌리기에는 충분했다. 혹시나 너무 독해서 고구마 잎이나 줄기가 상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지나친 기우였다. 마늘 즙 소주는 고구마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다.


8,9월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해외 출장도 있고, 개인적인 일로 좀 바빠서 몇 주 연속해서 못 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별 문제없이 고구마는 잘 자라갔다. 밭에 나가서 물 주고, 낫질 몇 번하면, 할 일이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고구마 순을 두 번 정도 잘라서 김치와 무침을 만들어 먹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다. 고구마 줄기 껍질 벗기는 일이 힘들어서 많이 먹지는 못하였다.


순서대로 5월, 7월, 9월의 사진이다.


이때부터 난데없이 고라니가 나타나서 고구마 잎을 왕창 먹어 치우는 일이 생겼다. 처음에는 잎만 똑똑 잘려 나간 자국을 보고, 나는 누군가 장난친 것이라 착각을 하였다. 회사 주말 농장이라 같이 농사 짓는 사람 중에 친하지만 짓궂은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 똑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 고구마 잎이 잘려진 곳을 쭉 연결해 보았더니, 밭 가장자리에서 기다란 콤파스를 삥 돌리듯 반원 형태가 되길래 목이 긴 동물이 한 자리에 서서 먹어 치운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가 많아 온 다음날 마르지 않는 땅에 고라니가 발자국을 남겨서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고라니를 쫓아 버리기 위해 크레솔 같은 기피제를 사용해볼까 잠깐 고민해 보았지만, 인가 근처까지 내려와서 불안한 마음으로 고구마 잎을 허겁지겁 뜯어먹은 고라니가 한편으로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체적으로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기에 별도로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고라니가  뜯어 먹은 잎과 발자국


10월초에는 어느 새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밭 구석구석까지 고구마 덩굴이 뻗어져 나가서, 이제는 밭은 마치 녹색의 바다 같아 보였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듯, 잎이 물결치듯 흔들렸고, 그 파도 사이에서 잠시 고단한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잠자리나 호랑나비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흐뭇하였다.


길 가에 서로 경쟁하듯이 핀 하얗고 빨간 코스모스와 밭 주변에 심겨진 감나무에서 제법 주홍빛으로 익어가는 고추감과 어우러져서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가꾸어 놓은 정원을 파 뒤집어 어지르는 것이 마음에 약간 걸리긴 하였지만, 내가 흘린 땀의 결실이 어느 정도인지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조금은 서둘러서 수확을 하였다.


이것도 요령이 없어서 처음 몇 개는 고구마 캐다가 삽질, 호미질에 고구마를 부러뜨리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시간과 힘이 너무 들어갔다. 호미질, 삽질 둘 다 너무 못하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삽으로 멀찌감치 땅에 꼽아서 조금씩 흙을 털어내고, 나무 뿌리 뽑듯이 한 번에 뜨는 방법이 그나마 괜찮았다. 물리치료를 하루 이틀 받아야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총 5박스 정도의 고구마를 수확하였고, 나름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무게는 대략 40kg정도 되었던 것 같다.


한 두둑에 하루씩 걸려서 고구마를 수확했는데, 10월초에 계속 태풍이 와서 땅속이 정말 뻘처럼 되어 있었다. 고구마를 흙이 꼭 싸잡고 있어서, 혼자서 빠르게 수확할 수가 없었다.


수확중인 고구마들


그래도 빨갛게 주렁주렁 고구마가 한꺼번에 땅에서 딸려 나오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든 아이처럼 내 마음도 두근거리면서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내가 해보니 물만 줬을 뿐인데 이렇게 튼실하게 자라나다니 너무 신기하고, 자연에게서 값없이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10월이면 다른 작물들은 이제 파종하고, 크게 손 가는 일이 없는데 나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미친듯이 삽질을 하며 뭔가 캐서 박스에 가득 담으니까 주변 농장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고구마 농사 잘 지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분은 좋았다.  


고구마 수확 후 며칠 간 집 베란다에 박스 채 쌓아 놓고 있으니 뭔가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삶아서 먹었는데 고구마가 아니라 밤 맛이 났다. 고구마 특유의 단 맛은 전혀 안 나고, 꽉 뭉쳐지고, 거친 느낌이었다. 숙성되지 않은 고구마는 처음 먹어보아서, 과연 맛있어질까, 걱정했는데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정말로 달고, 맛있는 고구마가 되었다.


수확이 끝나 베란다에 보관중인 고구마와 남겨진 고구마 밭


부모님께도 보내 드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우리 가족도 종종 먹고 있다. 둘째 딸은 이빨도 아직 4개 밖에 없는데도 고구마를 입에 한가득 넣고,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지만 몇 초 있으면, 벌써 다 먹고는 더 달라고 조른다.


첫째는 ‘이게 그 고구마야?’라고 매번 물어보는데, 아직까지 고구마 순이 자라서 고구마가 열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눈치다. 우리 딸이 두 살정도만 더 나이가 많았더라면, 아빠가 매주 데리고 나가서 같이 고구마 자라는 것을 봤을 텐데 이런 부분은 좀 아쉽다.


돈으로 따지면 고구마 한 개가 서푼 가격도 안 되지만, 이렇게 주변 분들에게 선심도 쓰고, 우리 가족 좋은 추억도 만들 수 있게 되었기에 힘들었지만 고구마 농사 짓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좀 힘들더라도, 내년에도 다시 신청해서 도전하고자 한다.


 



올 한 해 고구마 농사를 복기해보면, 일단, 경험이 부족해서 너무 힘들게 일을 한 것 같다. 올 한 해 경험을 바탕삼아 내년에는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고, 좀 더 많은 고구마를 수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비가 좁은 두둑의 고구마 수확량이 적었는데, 두둑만 잘 만들었더라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책에는 5월에 심고, 9월말에 파종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 경북은 좀 더 빨리 심고, 늦게 파종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고구마를 캐다가 느낀 것인데 내년에는 꼭 삽을 살 것이다. 주말농장 공용 삽 중에 매번 마음에 드는 삽 찾기가 어려워서 곤란한 적이 있었다. 좀 더 알아보고, 내년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고구마와 한 해를 살아보고 싶다.


주말농장을 통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자신감과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생전 처음인 일도 나는 실패하지 않고 잘 할 수도 있구나 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준비없이 덤벼든 일 치고, 좋은 결말이 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잘 알고,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강박관념에 너무 사로잡혀서 소극적인 자세로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내가 싫었는데, 이번 경험을 밑천 삼아 좀 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 2019년에 있었던 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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