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02.
그가 아들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수첩에 적어둔 것이 있었다. 왜 (WHY) 떠나는가. 여행 중에 해야 할 일 (TO DO)은 무엇인가.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 (NOT TO DO)은 무엇인가. 세 가지였다.
생각처럼 쉽게 채워지진 않았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 사랑하자>라고 적었다. 사랑이란 단어를 힘겹게 꺼내는 느낌이 더 지겨웠다. 두 번째 항목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같이 놀자>라고 쓰고, 끝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해야 할 일을 안 하기>라고 채우곤 이내 그만뒀다.
* WHY 왜 떠나는가? : <우리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 사랑하자>
* TO DO 여행 중에 해야 할 일 :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같이 놀자>
* NOT TO DO 하지 말아야 할 것 : <해야 할 일을 안 하기>
허나 다짐은 현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면 벽에 부딪히고 마는 법. 출발 당일에도 그는 아이가 공항 카트를 밀고 가다 심하게 부딪히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아얏! 으윽읔!"
사건의 전말을 감추기 위한 아이 특유의 엄살이 입 밖으로 퍼져 나왔다. 자신의 부주의를 아픔으로 덮고자 하는 의도도 일부 섞여 있었다.
"조심 좀 하지!~"
자동판매기 누르듯 그의 반응도 반사적으로 흘러나왔다. 아이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고 공중에 맴도는 공기를 깊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적막이 흘렀다. 이런 반응은 다년간의 학습으로 인한 상호작용임을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침묵에 불편함을 느낀 그가 잠시 후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
어렵사리 입 고리를 끌어올리며 꺼냈다.
"아까와 같은 상황에선 아빠가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일종의 화해를 기대하고 건 낸 대사였지만 아이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아빠! 그럴 때는 말이야~ '괜찮아?~' 그러는 거야!"
"그런데 아빠는, '그러니까 조심 좀 하지' 항상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잖아!"
아이는 손바닥을 허리춤 아래로 탈탈 털고 있었다. 순간 묘한 분노가 치솟았다. 자기한테 뭐라고 지적하는 소리가 영 듣기 싫었다.
"또, 또, 불평한다!"
"넌 지금, 내가 묻는 말에만 답 할 것이지, 왜 지나간 과거를 자꾸 들춰내서 남 탓으로 놀리냐!"
"그리고 내가 그런 식으로 불평하지 말라고 했지!"
아이를 쏘아붙이는 자신의 행위에도 놀랐지만, 도대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무엇 때문에 격분하는지 아직까지 저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