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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심 Jun 13. 2024

찰나에 우울증 흘려보내기

한 시간이면 충분

우울은 상시 주변에 옹그리고 있다가 마음이 물렁해 보이는 순간 날아와 박힌다.

새 지역에 전입 신고한 지 보름쯤 되었을 때 올 것이 왔다. 다행히 한 시간 안에 사라졌지만, 방심하다 기습 감정을 맞아서 그런지 나 자신이 낯설도록 정신을 못 차렸다.

사건의 발단은 엄마가 보내주신 마지막 짐이었다. 혼자 살던 서울 집에도 부모님 집에도 이제 내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마음속 무언가가 훅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시린 바람이 불었다. 집안일을 하던 손에서는 힘이 빠지고 눈물이 넘쳐 올랐다. 벌써 무너질 내가 아니라 사회연결망에서 배운 대로 남편과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서울에서 마지막 짐을 받았는데 갑자기 무기력해져서 누웠어'

만에 하나의 상황을 위해 우울증 대처법을 외우고 또 외운 결과다. 둘 다 대답이 느리면 그다음은 엄마, 아빠에게 연락해 시시콜콜한 아무 말이나 하고, 그것도 아니면 무작정 밖에 나가서 한두 시간 빠르게 걸을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답장이 왔다. 남편을 잠시 소개하자면 따뜻한 로봇으로써 이성에 가까운 사고가 매력인 반면 그의 말과 행동은 왕왕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번에 돌려준 한 마디는 의외였다.

'그 짐은 나랑 같이 정리하면 되죠'

우울은 채워지는 순간도 찰나다. 지금 떠올려 보면 당시 남편 입장은 말 그대로 정리할 짐이 많아서 내가 드러누웠으니 같이 하자는 의미였을 것이고, 내 입장은 '같이'라는 표현이 위안이었을 것이다. 진실이 어떻든 상관 없다. 남편도 정서적으로 내 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새 환경에 잘 적응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던 나도 외로움을 탄다는 사실을 배웠다. 물론 몇 분 더 이따가 돌아온 친구 한 마디도 좋은 충전재였다. 우울함을 해소하는 일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지만 마음도 몸처럼 한 번 아프기 시작하면 언제든 비슷한 증상이 다시 찾아온다. 이제 이 감정을 잘 쓰다듬으면서 성숙해질 일만 남았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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