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하겠지만 그게 사랑이더라

by 그린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이제껏 당신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나는 사랑이라고 답했다.

밤새 이야기 해도 모자랄 그 어마어마한 주제를 달랑 가져다 얘기하고 나니 더 말하고 싶지만 ,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멈추었다. 사랑. 사랑.사랑 ....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하면 그냥 눈빛이 스치기만 해도 파바박 불꽃이 이는 사랑을 얘기할 거고

누군가는 죽고 못 사는 눈물 젖은 사랑을 떠올릴 거고 , 듣기만 해도 수많은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엉키는 것 같다.

요즘 나는 사랑을 그런 이미지들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건 보기 좋은 포장일 뿐이고

비 오는 날 앉아있으면 따끈히 몸이 데워지는 , 그러면서도 주변 공기도 말려주는 온돌 같은 것이 사랑 같다.

데우는 데도 오래 걸리고 , 같이 몸을 기대고 있으면ㅇ건강해지고, 주변도 따뜻해지는

그런 게 사랑 같다. 반짝반짝 빛나고 요란한 색 없어도 , 저 멀리서 오로지 상대만 바라보고

상대에게만 조명을 비춰서 주변은 망가지든 말든 오직 둘만의 사랑만 지켜내는 그런 거 말고 말이다.

내가 필요할 때 내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들에 나는 사랑을 느낀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야 될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말을 하거나 약속한 것은 지키려고 하는 편이고

그걸 지키다 보면 애정이 생기고 사랑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책임감이라고 이름할 것도 같고

눈앞에서는 뭐든 다할 듯 온갖 표정에 몸짓에 약속을 다해놓고서 멀어지게 되면은근히 슬적 모르는 척하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싫다.

무엇이든 지켜주고 지켜내는 마음이 있어야 그게 사랑 같다.

나 스스로에 대한 사랑도 있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있고 자식에 대한 사랑도 있고

요즘은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하는 것도 애정이 없음 하지 못할 것 같다. 오랜 시간 대하다 보면 애정이 생기겠지,

얼마 전에 본 어쩔 수가 없다란 영화가 생각난다.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해 온 남자들 ,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밀려나 그(퇴직, 더이상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데

한 명(이병헌)은 필사적으로 그 자리에 돌아가려고 애를 쓰고

다른 한 명(이성민)은 돌아갈 수 없음에 점점 자기 파괴적 행동을 보인다

차승원이연기한 마지막 사람은 그리 아쉬워하지도 않고 , 그저 자신의 삶을 지키려 애쓴다(다소 비굴해 보여도).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건 주인공 이병헌의 행동들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고 가족들을 사랑한다면서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 다른 이들의 삶을 망가뜨리면서 성취한다. 남의 불행은 그저 남의 일인 뿐인 건지

이기심의 극단은 어디까지 가는지...

어쩔 수 없이 스포해 버렸다.

이 영화는 이것 말고도 이야기할 건 많지만 , 여기서의 이기적인 사랑이 참 불쾌했던 기억으로 남는다.


오래전 기억이기는 하지만 삶의 원동력이 사랑이라 자신 있게 대답한 배경은 나에게 일어난 아주 큰 사건 때문인데

몇 해 전에 보이스 피싱을 당한 적이 있었다. 여분의 자금을 넣어놓은 통장을 홀랑 그것도 하루 만에

털린 기억이 있다. 아침 9시에 통화를 시작해서 6시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기까지

무엇에 홀린 듯 전화기를 붙잡고 , 밥 먹는 이십 분 이외에는 계속 대화를 하고 내내 내가 케어받는다는 기분이 들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 그놈도 어딘가에 묶여서 이러 일을 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잔금을 넣을 때, 내일 하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미 뭔가에 쓰여 있는 난, 모든 돈을 송금하고 한 시간쯤 뒤에야 속은 것을 알았다.

나쁜 놈도 나쁜 놈이지만 , 너무나 어리석게 속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창피하고, 난감한 상황이라니

누군가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도 복이란 걸 그때 알았다.

큰 일 앞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 아니면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경찰에 신고하고 , 은행에 접수하고 ,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상시면 야근을 하고 돌아올 늦은 시간 집으로 들어가는데 너무 억울해서 뭐라도 하고 싶은데 할 것이 없었다.

술을 마시던 달밤의 체조를 하던 뭐라도 하고 싶은데 ,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 기계는 사고도 안 나나 싶고, 고층 아파트에서 확 뛰어내릴까 싶다가도 이 정도면

깨끗한 사망이 아니고 구질구질한 장애가 될 것 같아서 집 앞에서 서성거릴 때

우리 집안에서 작게 들리는 애들 소리랑 TV소리

문득 든 생각이 내일 아침 애들은 누가 밥은 누가 해주지?

학교는 누가 보내주고 양말은 누가 챙겨주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실수로 생긴 불행을 아이들의 불행으로 전염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조용히 들어가자, 그 이후로 내 삶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은행잔고가 비어서 계속 아직도 고생을 하지만 , 죽거나 다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나에게는 사랑이 있고, 그것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누군가 너는 그런 일이 있었지만 , 너를 아직도 사랑한다 고백받은 적도 없고

네가 있으니 우리가 잘 버티고 있다, 격려받은 일도 없다, 큰 고난 앞에서 비난도 물론 받은 적이 없다.

어차피 내가 책임져야 될 일이니까.

지금 생각하면 한 번쯤 생난리를 쳤을 거 같지만 , 거짓말처럼 아무 일 없이

집에 가서 샤워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 그때를 지나왔다.

난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워도 지켜내는 것.

그렇게 노력하는 것.

내 사랑이 누구를 움직이게 하고 , 지킨 것이 아니고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한다는 자체가 나를 지켜준 것 같다.

사랑이란 그래야 될 것 같다.

너를 지키려 하면서 더욱더 내가 강해지는 것

내 사랑으로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는 것


티브이에 매일 나오는 사랑, SNS에 매일 보이는 사랑의 그림들

남의 연애도 생중계로 구경하는 세상이라 , 재밌다고 보더라만 난 도저히 십 분을 넘기기가 어렵다.

왠지 시장에 장 보러 나온 사람들 같아서, 자신의 가치에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사람을 거래하러 나오는 거 같아서 보는 내내 불편하다

물론 요즘 시대는 어렇게 말을 하고 반응을 하는구나 가볍게 보면 재밌을 거지만 사람이 너무 한쪽면으로만 평가받고 , 사람 자체가 경시되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지나가다 문을 열어주는 작은 호의 라도 진심이 좋다.

계산이 깔려있는 달콤한 호의보다는

하물며 사랑인데, 것도 일생을 약속할 사랑에

지금의 내 계산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지금의 내 앞의 멋진 이성이 앞으로도 계속 변하지 않고 이 상태로 있을 수 있을까?

교통사고가 날 수도 있고,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가진 재산 한순간에 날릴 수도 있다.

우리가 서로 담보해 줄 수 있는 건 진심으로 사랑했었고 , 믿고 있다는 신뢰가 아닐까?

앞으로의 긴 세월을 예측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다.

어리석은 김에 그냥 쭉 어리석게 사랑하면 안 되나

계산하지 말고 , 조건 따지지 말고 , 서로에게 끌리는 매력으로

진심 어린 마음이 있는 사랑으로


진짜 일상을 지켜주는 사랑은 덤덤하다, 어떤 고백도 표현도 필요 없다.

섭섭하겠지만 그게 사랑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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