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식당
순대국 한 그릇이 간절한 날이 있다. 뜨끈한 국물에 코끝이 시큰해지고, 허름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새우젓을 풀어 넣는 그 순간.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한 끼지만, 내게 순대국은 살아온 시간의 표지판 같은 음식이다. 순댓국은 저렴한 가격에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촌, 청춘의 첫 국물
대학 시절, 신촌 복개천 옆—지금의 현대백화점 뒤편—에는 두세 군데 순대국집이 모여 있었다. 순대 한 접시에 국물은 무한 리필. 우리는 그 국물에 순대 한 개씩을 담가가며 소주를 마셨다. 소주 한 잔, 순대 한 개. 그것으로 충분했던 스물의 저녁들. 배고픔과 우정이 뒤섞인 그 국물 맛을, 지금의 어떤 순대국도 재현해내지 못한다.
홍능 ‘오소리감투’, 맛의 각성
본격적으로 순대국에 눈뜬 건 직장 근처 홍능 개천가의 ‘오소리감투’에서였다. 허름한 가게는 주인이 돈을 좀 벌면 문을 닫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열곤 했다. 그 사연을 알고 있지만 여기 적기는 조심스럽다. 중요한 건, 이 집에서 나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순대국의 진짜 맛과,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 특히 머리 고기의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 내장의 깊고 진한 풍미는 계시에 가까웠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에 자리 잡아 동네 안쪽으로 이전했다. 한번 찾아갔을 때, 맛은 그대로였지만 넓어진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음식의 맛은 단지 혀끝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좁은 테이블, 김 서린 창문,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대화까지—그 모든 것이 한 그릇의 맛을 완성한다는 걸 그날 알았다.
이천, 황해도식 순대의 발견
우연히 이천시장을 구경하다가 발견한 집이다. 이천시장 복개천 길가 주차장 근처의 한 순대국집. 이곳은 황해도식 순대를 내는데, 속에 파가 많이 들어가고 선지가 듬뿍 들어간 게 특징이다. 순대를 한 입 베어 물면 파의 알싸한 향과 선지의 부드러운 식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약간의 돼지 누린내가 있지만, 그게 오히려 이 집만의 정직한 맛이다. 한번 맛을 알고 나면 이천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다.
삼성동, 도심 속 보물
연구원이 삼성동에 있을 때 저녁 한잔 하러 자주 가던 집이다. 삼성동 코엑스에서 포스코 방향으로 한 블록, 우회전해서 30미터만 올라가면 ‘박서방네 순대국’이 있다. 순대국도 훌륭하지만 이 집의 진가는 돼지머리고기에 있다. 쫄깃하면서도 기름기가 적당히 배어 있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점심시간이면 최소 10분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 시간조차 기대감으로 채워진다. 지금도 무역협회 등에 가게 되면 자꾸 이집이 생각나 식사때가 맞지
않아도 들리곤 한다.
죽전과 분당, 일상의 순대국
최근 몇 년간은 죽전 보정동 ‘토종순대국집’을 즐겨 찾았다. 집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지만, 순대 속재료는 백암이나 병천 순대보다 못해도 국물 맛은 뛰어났다. 그런데 어느 날 문을 닫고 다른 음식점이 들어섰다. 익숙한 곳의 상실은 작지만 확실한 슬픔이다.
지금은 분당 미금역 먹자골목 ‘박가네 순대’를 다닌다. 깔끔한 국물 맛에 집사람도 좋아하는 곳이다. 순대국은 결국 함께 먹는 사람과의 합의점이기도 하다.
백암 ‘중앙식당’, 순대의 본향으로
요즘은 백암 ‘중앙식당’을 자주 찾는다. 죽전에서 가기엔 제법 먼 거리지만, 그 시간 투자가 아깝지 않은 집이다.
. 전국 최대 돼지 사육 두 수를 자랑하던 백암에서 순대가 대표 먹거리가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돼지가 많은 곳에 좋은 순대가 있고, 좋은 순대가 있는 곳에 진한 국물이 있다.
‘중앙식당’은 3대째 순대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전통 있는 집이다. 3대라는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조부모의 손맛이 자식대로 계승하는 동안 쌓인 세월의 깊이다. 그 깊이가 고스란히 국물에 녹아 있다.
이 집 국물은 진한 사골국 맛이다. 첫 술을 뜨면 입안 가득 퍼지는 구수함에 눈이 저절로 감긴다. 오래 우려낸 사골의 진액이 돼지 부산물의 깊은 맛과 만나 만들어내는 조화. 순대를 국물에 담갔다 건져 먹으면, 부드러운 속재료와 쫄깃한 껍질 사이로 그 진한 국물이 스며든다. 새우젓을 조금 풀고, 다진 양념을 살짝 얹으면 비로소 완성이다.
백암까지 차를 몰고 가는 시간 동안, 나는 이미 그 국물 맛을 상상한다. 가게 앞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식당 문을 열 때의 설렘, 뜨거운 뚝배기가 나올 때의 기대감. 이 모든 것이 한 그릇 순대국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맛있는 음식은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까지도 맛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지극히 주관적인, 그래서 소중한
순대국은 국민 국밥이다. 전국 어디에나 유명한 집이 있고, 누구나 자기만의 단골집이 있다. 객관적인 순위를 매길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음식. 하지만 바로 그 주관성이 순대국을 특별하게 만든다.
내 삶이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순대국집을 개척했다. 집을 이사하면, 회사가 옮겨가면, 그 동네의 순대국집을 찾아냈다. 순대국집 지도는 곧 내 삶의 지도가 되었다. 어느 해 어느 동네, 어떤 사람들과 함께—그 모든 기억이 한 그릇 국물 속에 녹아 있다. 지나온 날들을, 함께했던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