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라는 푸념의 옷
딸 녀석이 초등학생 자기 딸 미술공부 준비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하면서도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 사주는 것을 보았다. 저렇게 자식에게 쏟는 정성의 일부라도 부모에게 한다면 효녀 소리 들을 텐 대 하면서 투덜거린 적이 있다.
하긴 나도 가장 돈 많이 들어가던 아들 딸 대학시절에 따로 나가서 공부하겠다고 해도 앞뒤 재지 않고 돈을 물쓰듯 쓰면서 뒷바라지해주었다. 그 때문에 생긴 흔적이 아직 남아 있지만. 분명히 우리 부모님도 나에게 그러셨을 것이다. 여유로운 생활이 아니었지만 공부할 때만큼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느낌이 남아있다. 남들 시골에서 학교 다니던 국민학교 3학년 때 비록 자취방이지만 서울로 유학 올 수 있었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나는 손주들 공부 가르치는 것이 어느 시간보다 행복하다. 어쩔 수 없는 ‘내리사랑’이라는 본능인가 보다.
이제 딸 녀석이 자기 자식에게 쏟는 정성을 보면서 부모에게서 받은 내리사랑의 빚을 자식에게 갚는 본능 같은 것을 보게 된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가 어떻게 자기를 키웠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는 부모가 만들어 낸 푸념에 불과한 것 같다.
어버이날을 축하한다는 아들 딸, 손주들을 보며, 왜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는 것일까? 돌아가신 부모님의 푸념 때문이 아닐 것인데. 혹시 나도 곧 우리 부모님을 따라갈 테니까 자식들도 나처럼 부모님을 생각했으면 하는 또 다른 푸념 준비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리사랑’을 다하고 나서야 진정 부모님에 대한 ‘올리사랑’이라는 본능이 발현되는 것일까?
부모에 대한 이타적 사랑을 효도로 갚는 것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과 양육에 보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부모의 사랑에 대한 효도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학습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무리 명문(明文)으로 포장해도 본능으로 부모사랑만큼 효도를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있어도 그 반대되는 경우는 어렵다는 '하애유 상애무(下愛有 上愛無)'라는 말이 있을까.
그래도 어버이 날이 버젓이 있지 않은가? 세상을 이끌어가는 힘은 내리사랑이라는 본능이지만, 학습으로 만들어진 푸념이라는 옷도 입고 있어야 하기 때문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