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길 씨의 심부름

[분단의 비극, 그리고 달라진 언어의 비극(79)]

by 겨울나무

성길 씨가 한동안 ① 옆차기를 뒤적거리더니 몹시 낭패한 표정이 되어 방에 있는 혜영이를 부르고 있었다.

”혜영아, 미안하지만 잠깐 나와서 아빠 심부름 좀 해 줄래?“


성길 씨가 부르는 소리에 금세 방에서 나온 혜영이가 아빠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심부름인데?“


”아빠가 담배가 떨어졌거든. 그러니까 우리 집 저 앞에 있는 ② 수매상점에 가서 담배 한 갑만 사다 줄래? ③ 려과담배로 말이야.“


”응, 그런데 아빠! 려과담배가 뭐야?“


”아, 아니다. 지금은 모두가 려과담배로 나오니까 아무거나 한 갑 사 오렴.“


”응, 알았어.”


혜영이가 밖으로 나가자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던 아내가 성길 씨를 향해 한마디 거들었다.


”으이구, 그놈의 담배 좀 그만 끊어요. 건강에 좋지 않다는 담배를 왜 그렇게 아까운 돈을 버려가면서 끊지를 못해요?“


”누가 아니래. 누군 끊고 싶지 않아서 못 끊는 줄 알아? 생각 같아서는 ④ 한막대기씩 시키고 싶은데 그럴 형편도 못 되고…….“


”그럼 왜 못 끊는 건데요?“


”나도 모르겠어. 그게 그렇게 쉽지를 않네. 허허허……. 그건 그렇고 어제부터는 벌써 초여름 날씨여서 여간 더운 게 아니더라고.“


”맞아요. 벌써 여름이 온 것 같더라니까요.“


”누가 아니래. 어제 한강 공원으로 더위를 피해 나온 시민들을 기자들이 조사해 보니까 너무 더워서 그런지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⑤ 얼굴가리개를 쓰지 않았다고 하던 걸.“


”그래요? 아무리 더워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거 너무한 거 아녜요? 왜 그렇게 조심들을 하지 않는 건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그러게나 말이지. 이렇게 날씨가 계속 더우면 우리도 곧 ⑥랭풍기를 켜고 살아야 할 것 같은걸.“


”그러니까 이래저래 돈만 나가게 되는 거죠.”


“돈이 나가다니?”


“전깃세 말이에요.”


“아하,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구먼. 그놈의 돈, 돈, 돈. 그놈의 돈들이 다 어디로 가서 이렇게 돈구경하기가 어렵담!”


성길 씨는 이렇게 대꾸하고 나서 잠시 긴 한숨을 내쉬고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어제 잠깐 교외로 나가 보니까 벌써 못자리들을 하느라고 한창 분주하더군.”


“그렇죠. 벌써 4월이 다 가고 있는데 못자리 할 때가 됐죠.”


“옛날에는 농사 짓기가 몹시 힘이 들었는데 요즘은 모를 나는 일도 지게 대신 모두 ⑦ 농장달구지 같은 것으로 운반하니까 농사꾼들이 아주 편리해졌지.”


“편리해진 대신 그 모두가 돈이 있어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아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성길 씨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차암! 우리들이 가끔 먹고 있는 ⑧ 꼬부랑국수 말이야.”


“그래서요?‘


”그거 ⑨마룩이 맛있다고 후루룩 다 마셔버리면 안 되겠더라고.“


”그건 또 왜요?“


”꼬부랑국수를 만들 때 그 속에 ⑩ 썩음막이약을 넣는다는 거야. 그러니 그런 걸 먹어서야 되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놓고 먹을 음식이 어딨어요. 그러려니 하고 속고 먹는거죠.“


그때 담배를 사러 갔던 혜영이가 담배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 바람에 성길 씨 내외의 대화는 잠시 끊어지고 말았다.( * )









< 북한말 풀이 >


① 호주머니 ② 편의점 ③ 필터담배 ④ 한보루 ⑤ 마스크

⑥ 에어컨 ⑦ 경운기 ⑧ 라면 ⑨ 국물 ⑩ 방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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