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래 걸음이 빨랐다. 헬스장 러닝머신에 단련돼 그런지 매우 빨랐다. 주위에서는 나보고 걸음이 빠르다며 놀랠 정도로.
하루는 동생과 문방구에 가기로 했다. 문방구까지는 50분 정도 걸어야 됐다. 나는 좀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걷기로 했다. 날씨도 좋으니까.
나는 평소대로 걸었다. 딱히 의식할 것도 없었다. 걸음이란 건 습관이었으니까. 나는 앞만 보였다. 목표 지점만 눈에 보였다.
그러나 동생은 한참이나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나보다 걸음이 훨씬 느렸다. 나는 좀 답답했다. 느린 것도 느린 것이지만, 길 위에서 이러면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집에서 해야 될 공부도 있고, 읽고 싶은 책도 있는데, 이 속도로 언제 문방구에 가고 구경한 다음 물건을 사고 집에 가 내 할 일을 할까, 싶었다.
나는 별 것도 아닌 일이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던 탓에 동생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얼른 문방구 가자, 너무 느리게 걷잖아.”
동생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걷는 게 힘든 듯했다. 내 딴에는 동생이 평소 운동을 안 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있는 것을 워낙 좋아하니, 걷는 게 익숙지 않다고 말이다. 이참에 이렇게 같이 걸으며 운동도 시켜야지, 하는 마음으로, “얼른, 얼른 와”라고 걸음을 재촉하는 건 그런 면에선 당연했다.
한 5분 되었을 때였나. 동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오빠, 너무 빨리 걷잖아. 나 다리 아퍼.” 그리곤 천천히 걷거나 쉬어가자고 했다.
“얼른 문방구 가야지. 여기서 쉬면 안 돼. 오빤 집에서 할 일이 있거든” 나는 얼른 문방구에 갔다가 집에 가고 싶었다. 시간은 금보다 귀한데, 나는 지금 얼마나 많은 금을 이 길 위에서 날리고 있는지 싶어, 탐탁지 않았다. 나는 얼른 걷자고만 했다. 이렇게 배려 없는 오빠도 없겠지만.
동생은 참다못했는지 말했다.
“그럼, 오빠 먼저 걸어가!”
그리곤 전보다 한참 뒤에서 걸었다. 나도 그 정도 되면 이해해야 됐을 텐데. 오히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더 안 좋았다. 말 조금 했다고 이러다니.
나는 먼저 문방구에 가 있을까 했다. 구경이나 실컷 하고 있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문방구에 ‘같이’ 가기로 했는데, 나 먼저 가 있다니. 그러면 ‘같이’의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보폭을 좁히고 속도를 낮췄다. 이상했다. 보폭을 줄이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일단은 동생과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됐다. 동생이 보는 곳을 나도 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야기 꽃도 피우기 시작했다.
“오빠, 저기, 저 카페 봐봐. 진짜 이쁘다”
“어, 여기에 치킨집이 있었네? 이 치킨 진짜 맛있겠다”
“우우와!, 우리 시간 나면 여기 디저트 집 가보자! 이 디저트 집 진짜 맛있대!”
“오빠, 저기 어떤 남자랑 여자가 싸우고 있어. 근데 남자가 꼰대처럼 보여. 팔짱을 끼고 여자한테 가르치고 있어!!”
“여기 꽃 좀 봐. 꽃잎이 너무 이뻐. 잠깐만 사진 좀 찍을게”
“우와, 오늘 달이 너무 이쁘다. 달 좀 찍어보고 가자”
며칠이 지나니 나는 동생이 꽃을 보고 있으면 나란히 서서 “이 꽃 뭘까?” 말도 붙이는 여유가 생겼다.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게 개나리 진달래 목련 무궁화 철쭉 모두 다 ‘꽃’이었지, 찬찬히 살펴볼 꽃들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꽃들을 보느라 걸음을 멈추다니. 그 꽃이 무엇인지 스마트 카메라로 찾아보기까지 한다니.
나는 항상 무엇이든 빨리 걸으려 했다. 물리적인 부분보다는 ‘심리적’인 부분이 특히 그랬다. 얼른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야지. 그래야 행복하지. 얼른 취업해서 자리 잡아야지, 그래야 행복하지. 그렇게 빨리 도착하려고 한다. 얼른 목표에 도달해야 된다고.
물론 그것도 중요했다. 분명, 얼른 ‘합격’하는 게 좋았다. 그래야 다들 말하는 ‘정상적인’ 삶에 근접했으니까. 그러나 가끔은 되물을 기회도 필요했다. ‘얼른’ 합격하기 위해 곁에 있는 사람을 등한시하고 있진 않은지, 내가 바쁘다고, 내가 마음이 급하다고, 같이 걷는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건 아닌지. 앞만 보고 걷다 보면 곁에 누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으니까. ‘합격’을 하는 이유는 곁에 있는 그 사람과 행복하기 위함인데. 곁에 있는 사람들과 행복하기 위해 '성공'하는 건데.
그래서
나는
오늘도
느리게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