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의 세 번째 행선지는 스위스 작은 마을 아펜젤이었다. 이 마을에서 열리는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교환학생 수강신청을 할 때부터 날짜를 맞춰 시간을 비워놓았을 만큼 기대하고 있던 취재였다.
(내가 공부했던 학교에서는 Intensive 코스가 있어 한 과목을 일주일 내내 공부하고 끝내는 방식이 있었다.)
로컬 푸드 가게를 취재했던 리옹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다음 날 아침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하는 일정을 세웠다. 짧은 일정 동안 숙박비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야간 버스를 적극 활용했다.
스위스 취리히에도 기차를 한 번 갈아타야 갈 수 있는 작은 마을 아펜젤. 내가 취재할 행사는 아펜젤의 직접 민주주의 행사, 란츠게마인데였다. 란츠게마인데는 일 년에 한 번, 지역 현안에 대해 모든 주민이 커다란 광장에 모여 손을 들어 직접 투표하는 이색적인 행사다. 란츠게마인데는 내 프로젝트의 다른 취재와 다르게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로컬 크리에이터 활동의 결과는 아니다. 오히려 비밀 투표가 보편화된 현대까지도 오랜 역사를 지켜온 전통에 가깝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아펜젤이라는 특정한 마을을 대표하는 행사로,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이벤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취재 대상으로 선정했다.
작고 평화로워 보이는 아펜젤의 풍경은 스위스의 시골에 대한 로망 그 자체였다. 마음 같아서는 행사 하루 전날 밤을 아펜젤에서 묵으며 평화로운 마을의 분위기를 한껏 느껴보고 싶었지만, 다른 관광지와 다르게 매우 비싼 관계로 패스했다. 그 대신 취리히에서 2박 동안 머무르며 하루는 개인적으로 가보고 싶었던 퀸 박물관을 보러 몽트뢰로 당일치기를 다녀오고, 그다음 날 아펜젤을 당일치기로 돌아오는 일정을 계획했다.
야간 버스를 타고 스위스에 오고, 취재 바로 전날에는 취리히에서 퀸 스튜디오가 있는 몽트뢰를 방문하기 위해 무려 버스로 8시간 당일치기를 소화했기 때문인지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란츠게마인데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하고, 한 번 기차를 갈아타야 했기에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카메라를 챙겼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갔지만 리마트 강변의 평화로운 모습이 눈에 보이고, 신선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기차역으로 향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번 행사는 특성상 무작정 찾아가 사람들을 인터뷰할 심산이었는데, 약간 긴장이 되었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인데, 사람들이 영어를 잘 못하면 어떡하지? 혹은 가는 길도 독일어 투성이일 텐데 내가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자잘 자잘한 걱정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낯선 독일어를 놓치지 않으려 잔뜩 긴장한 채 기차를 갈아탈 준비를 하던 때였다. 30대 즈음으로 보이는 외국인 여행자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너도 란츠게마인데를 보러 아펜젤에 가니?"
설마 이 작은 마을의 행사를 보러 가는데 동행이 생길 것이라고는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으므로 약간 얼떨떨했다. 생각해보니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스위스 작은 마을에 가는 기차에 동양인 한 명이 덩그러니 타고 있으니 색다르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펜젤에 간다고 답하자 옆에 있던 친구들을 소개해 주며 물었다.
"우리도 란츠게마인데를 보러 가. 같이 갈래?"
안 그래도 아펜젤로 찾아갈 길에 독일어 투성이라는 사실이 걱정스럽던 찰나 듣던 중 반가운 제안이었다. 이 특별한 마을에 가는 여정을 함께할 친구들이 생긴다니 기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환승할 역을 알리는 안내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야! 여기서 갈아타야 해!" 독일어 발음. 참 어렵다. 더군다나 다음 아펜젤행 기차로 갈아탈 시간은 불과 6분. 환승할 정거장까지 가려면 빠듯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생긴 동행들과 허겁지겁 달려갔다.
무사히 다음 기차를 타니 대다수가 란츠게마인데를 보러 온 관광객이었다. 개중에는 의외로 중국인 단체 여행자도 있었다. 내 생각보다 란츠게마인데는, 더욱 관광화된 이벤트인가 보다.
한숨 돌리며 커다란 창밖으로 스위스 전원의 평화로운 풍경이 보였다. 산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집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 걸까. 알프스 하이디와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아마 더 험난한 산에 살겠지만;;) 즐거운 상상을 해보았다. 그렇게 스위스 전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 명은 호주, 한 명은 독일, 한 명은 스위스 출신으로 취리히에서 일하게 되며 알게 된 사이라고 했다.
내가 다른 관광지도 아닌 이 곳에 오게 된 이유를 궁금해하길래,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그중 두 명의 친구가 본인들은 스위스의 모든 칸톤(canton: 스위스의 주)을 방문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뿐만 아니라 군산, 양양, 속초 등 곳곳의 도시를 방문하는 소도시 여행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란츠게마인데에 맞추어 방문했다고. 다른 한 명은 여행 사진작가로 세계를 곳곳을 누비며 일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 나의 여행 이야기, 친구들의 직장과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세
아펜젤에 도착했다.
스위스 모든 칸톤을 섭렵하겠다는 꿈을 가진 여행자답게, 친구들은 기차역에서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초입에 자리 잡은 기념품 가게부터 들려 아펜젤을 상징하는 깃발을 샀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 곰의 모양이 새겨진 아펜젤의 깃발. 1403년까지 아펜젤의 영주였던 생갈렌(St.gallen)의 수도원장을 의미하는 깃발이라고 한다. 수도원장과 곰이 무슨 상관이냐고? 아펜젤 근처의 도시 생갈렌을 세운 사람이 아이리스 선교사인 갈루스인데,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갈루스 선교사가 배고픈 곰을 마주쳤다. 그런데 이 선교사, 용감하게도 곰을 보고 달아나지도 않고 오히려 빵 한 조각을 주었단다. 그에 감동받은 곰이 오두막을 짓기 위한 나무를 가져다주었고, 그렇게 지어진 오두막 주위에 그 유명한 생갈렌 수도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생갈렌은 스위스의 유서 깊은 도시로, 특히 생갈렌 수도원이 중세 학문과 예술 발전에 기여를 했다. 현재에도 특유의 양식과 문화예술품으로 인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되며 많은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도시다. 우리나라 단군신화에서 곰이 마늘 먹고 사람 된 것처럼, 이 곰은 빵에 감동받아 나무를 주었다지...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던 아펜젤의 이야기. 화려한 도시와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스위스 전통 의상을 입은 그림과, 아펜젤 주 깃발이 곳곳에 꽂혀 있던 모습을 보며 비로소 이곳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동행과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취재 사상 가장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좌충우돌 란츠게마인데 탐방기와 시민 인터뷰는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