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끊임없이 읽고, 많은 생각을 하지만 모든 생각을 글로 풀어낼 수는 없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가끔은 이러한 팩트가 사람을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오늘은 무슨 글을 쓰지?' 한동안 이 질문을 하지 않고 살았다. 읽으면 읽는 만큼 그 안에서 쓸거리들이 생겨났다. 기쁜 마음으로 간단히 메모를 해 두고 나머지 시간은 즐기면서 책을 본다.
어느 순간부터 글감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역시 비어있는 머리와 함께 아무 생각 없이 노트북을 열었다. 백지에 벌써 이만큼이나 나열해 놓은 것을 보니 미처 잡아채지 못한 쓸거리가 있긴 한가보다.
생각보다 조금 지친 건지도 모른다. 3년 동안 매일 쓰겠다며 호기롭게 내지르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이번 한 달은 참으로 길기만 한 것 같다. 매번 글로 힘들다를 토해내는 내 모습도 슬슬 짜증이 난다.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왜 읽고 쓰고 있는가?'
최근 <김미경의 리부트>를 출간한 김미경 작가가 슬럼프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슬럼프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을 때 오는 거야. 슬럼프가 왔다는 건 슬럼프가 있는 데까지 열심히 걸어왔다는 거지. 슬럼프까지 가는 게 너무 힘들지. 슬럼프가 왔다는 건 거의 다 됐다는 뜻이야. 이것만 넘어가면 무엇인가 된다는 거야. 이제 남은 건 내 슬럼프를 직시하고 그다음에 뭐가 있을 거라는 걸 믿고 넘어가기만 하면 돼. 이 과정을 반복하면 계속 열등감과 싸우고 우월감을 지나다가 다시 열등감과 싸우는... 감정이 왔다 갔다 하니 미친놈 같은 거지. 그래서. 자기들은 요즘 열등감에 빠져있는 중이야 우월감에 가까운 거 같아?"
정확하게 나는 지금 열등감 속에서 '이걸 왜 하지' 하면서도 단호히 포기도 하지 못하는 중이다. 이런 내게 그녀는 "열등감도 우월감도 내가 꿈꾸고 있다는 증거다."며 열심히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슬럼프도 찾아오는 거라고 말한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다."
따뜻하게 스스로를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해 주라고 한다. 더불어 규칙적으로 내 열등감을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고 한다. 세상에 그걸 챙겨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며.
나는 내가 무엇을 바꾸고 싶거나 깊은 염원이 있으면 100일을 계속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100일 동안 그 행동을 했다는 것은 바꿀 수 있다는 뜻이고 절박하게 노력했다는 뜻이다. 원하는 것을 100번씩 100일 동안 써보는 것은 그것을 나에게 증명해내는 시간이다. <돈의 속성> p.374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다음 달이나 내년에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돈의 속성> p.376
100일 동안 원하는 염원을 100번을 쓰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미신처럼 그렇게 적으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며 마케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에 나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게 뭐든 하물며 '로또 1등에 당첨된다.'도 100번씩 100일 동안 쓰면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했다.
무엇이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쓰기만 한다고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럼 왜 쓰라고 했을까? 100번을 쓰라는 건 쓰면서 그만큼 각오를 단단히 새기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100일을 매일 행하면서 몸에도 새기는 거다. 몸과 영혼에 정성을 다해 새기다 보면 슬럼프가 찾아온다. 불행히도 아직 약속한 100일이 되지 않았기에 모르지만 일단 그 시가를 넘겨본다. 지나고 보니 슬럼프는 거의 다 왔다는 신호였다는 것을 체감적으로 깨닫게 되고, 다시 다른 무언가를 새길 수 있는 경험치를 가지게 된다.
당연해 보이지만 그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나는 환경 설정을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모른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던 포기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슬럼프가 왔구나. 나는 살짝 지친 것 같지만, 거의 다 왔다는 신호구나. 거의 다 왔으니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지. 그냥 오늘도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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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잠시 재워두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있어 감사하다. 이 시간이 없었더라면 그저 읽고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또다시 하이에나처럼 책을 뒤적였을지도 모르겠다. 준비되지 못한 날것의 생각을 그저 떠오르는 대로 옮겨 정돈되지 않은 글이라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했으니 부끄러워 여기지 않고 그대로 내보낸다.
혹시 지금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오늘은 당신에게도 위로의 말을 함께 전하고 싶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정말 잘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