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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Aug 12. 2020

말랑말랑한 사람 품이 그립다.

다시 읽는 소설

구매 기록을 보니 1년 전이다. 한창 책은 읽고 싶은데 진도가 너무 안 나간다며 좌절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간과 동시에 핫했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다시 열었다.



리뷰를 보면 '매력적이다.'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이 너무 아쉽다.'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등의 호평이 이어진다. 정말 재미가 있을까? 솔직히 처음에는 별 다른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다. 상황상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 끝까지 읽을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초반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것과 다르게 중반부를 지나면서부터는 스토리에  몰입했고, 끝까지 읽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환호하는 정도의 호평을 나도 쏟아낼 수는 없었다. 역시 마케팅에 당한 것인가 했었다. 그랬던 책이었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시작부터 재밌다. 아마 당시에는 책 읽는 근육이 없을 때여서 몰입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일 수도, 책을 음미하고 읽을 만큼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조디는 카야가 엄마를 잠시 잊을 수 있도록 뭔가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아이는 헤엄치는 소금쟁이 그림자만 바라보았다. p.32


이 책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책이다. 구태의연한 단어밖에 떠올릴 수 없는 비루한 언어 실력으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카야의 깊은 외로움이다. 일곱 살에 혼자 버려진 아이의 외로움을 책은 딱딱한 응어리라고 쓴다. 아마 아픔을 느끼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상태가 아녔을까? 그녀의 응어리진 외로움과 두려움에 같이 젖어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렸다.

쿵쾅거리는 파도의 포효를 넘어 카야는 새들을 불렀다. 망망한 바다가 베이스를 노래하고 갈매기들이 소프라노를 불렀다. 갈매기들이 날카롭게 울어대며 습지와 모래밭을 내려다보고 원을 그리다가 카야가 파이 껍질과 롤빵을 던져주자 내려와 앉았다.  
몇 마리가 발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빵을 쪼아 먹는 바람에 카야는 간지러워 웃음을 터뜨렸지만, 잠시 후엔 빰을 나고 눈물이 흘러내렸고, 급기야 목구멍 너머 딱딱한 명치에서 꺽꺽 흐느낌이 비어져 나오고 말았다. 우유갑이 비자 카야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갈매기들마저 그녀를 버리고 떠날까 봐 너무 무서웠다.  p.73


카야가 버려진 나이가 일곱 살.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기도 하지만 막상 해보면 모든 것이 쉽지 않고 버거울법한 나이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이 하나 없이 세상의 모든 가시덤불을 날 것 그대로 지나가며 본능적으로 배우고 익히고 살아간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살고 있는 공간이 순수한 자연, 모두가 기피해서 다가가지 않는 습지였기에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자연은 (어디선가 읽은 표현을 빌리자면) 순수하게 좋은 것만도 아니니 말이다.


Photo by 蔡 嘉宇 on Unsplash


그녀는 암울한 늪의 호수로 갔네
그곳에서 밤새도록 반딧불이 등불을 벗 삼아 하얀 카누를 저었지

머지않아 나는 그녀의 반딧불이 등불을 볼 테고
그녀의 노 젓는 소리를 들을 테고
우리 삶은 길고 사랑으로 충만하리라
죽음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그 처녀를 사이프러스 나무에 숨기리
p.112


야생에 버려지다시피 한 카야를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도움을 준 이들이 있다. 그녀를 끝까지 사랑으로 지켜 준 테이트. 그녀의 사정(혼자 사는 어린아이)을 알고서 도움을 주고자 베풀어준 점핑과 메이블 부부. 카야는 죽도록 외롭지만 몇 사람의 도움과 사랑으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삶을 살 수 있었다.


처음 읽었을 적에는 습지 한 구석에 버려진 어린 여자아이의 일생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웠고 사람이 그리웠던 아이가 자연을 통해 삶을 배우고 몇 사람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이야기 같았다. (의도적으로 스릴러적인 부분은 배제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중임을 밝힌다.) 


책이라는 것이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소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저 생각의 여지가 많은 그런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책이었는데 다시 펼쳐 들게 되면서 상상과 생각을 넘나드는 시간도 길어졌다. 단순히 늪지의 생태계를 그린 것만 같았던 묘사도 하나하나 작가의 의도와 함축적 의미가 색다르게 다가옴을 느끼는 중이다. 이렇게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아까운 소설을 그냥 스쳤으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쉬울 것 같다. 


Photo by Becca Tapert on Unsplash


나는 그렇게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다지 사람 친화적(?)인 성격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세상에 완전히 혼자 버려진 외로움. 단순히 외롭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두려움에 가까운 외로움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멋모르고 허세를 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내 손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으려는 아이들과 살을 비비대며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가족들과 함께이다. 농담처럼 내뱉은 진심이 '하루만 아무도 몸에 안 닿고 잤으면 좋겠다.'였다. 책을 읽는 내내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너무도 아프고, 아름답고, 처절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유난히 살에 닿는 사람의 느낌이 더욱 감사하다. 오늘은 내가 먼저 아이들을 안고 잠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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