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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Jan 01. 2021

글 속 내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일까?

아직은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을 만나 독서 모임을 한 적이 있다. 매일 글을 쓰면서 서로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봐서였을까 다른 모임보다 대화가 빠르게 깊어졌다. 이십 년을 알고 지낸 친구에게도 설명이 필요했을 법한 이야기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 정도의 설명이면 충분했다. 깊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이. 글로 만난 사이가 아닐까?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작가 지망생이라는 말은 쓰지 않겠다. 그냥 작가면 작가인 거지 작가 지망생은 뭔가 싶다. 평생 지망만 하다 끝내고 싶지 않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니 나는 그냥 작가라고 뻔뻔하게 지칭하겠다.


하여간 매일이다시피 글을 쓰니 소재는 늘 나와 아이들, 남편 그리고 주위 사람이 주를 이룬다. 가끔 남편에게 글을 써도 되는지 허락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쓰는 편이다. 남편이 다른 사람과 겪은 일이 아니라 나와 있었던 일이니 절반의 권한은 나에게도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아마 지금 이 글도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내 가족을 스쳐가면서도 본 적이 없는 누군가가 읽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그중 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 ‘너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물론 글로 표현되는 이야기에 거짓은 없다. 진실만을 쓰지만 정말 그게 나와 내 가족의 전부일까? 그래서 가끔은 진실에 허구를 적절히 섞거나 혹은 상황을 조금 바꾸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야 누군가 불쑥 나타나 ‘너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더라도 ‘적절한 허구가 가미된 저를 만나셨군요.’하며 웃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이다.



Photo by Cristiano Pedroso-Roussado on Unsplash


글을 쓰는 목적을 완두콩을 골라내듯 콕 집어 하나만 골라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순서가 틀렸다. 목적이 있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글을 쓰다 보니 이런저런 이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래서 멈추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살다 보면 억울하고 답답한 순간이 있다. 의도와 다르게 전달된 말,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번져버린 행동으로 답답한 마음을 해명하고 싶을 때 당시에 하지 못한 말을 글로 풀어내면서 진심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한다. 그럴 땐 마음을 뒤집어 까서라도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게 내 모습이기도 하다.

반면 드러난 모습으로 재단하듯 나를 정의 내리는 이를 보면 보여주던 모습도 감추어버리고 싶어 지고 만다. 설사 그 모습이 진짜라 하더라도 왠지 누군가가 반듯하게 재단한 나는 부정하고 싶어 진다.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 하면서.


작가(쓸 때마다 낯 뜨겁지만 뻔뻔한 척하고 계속 쓰겠다)가 되어 글을 써보니 어느 장단에도 나는 존재한다.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  ‘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더욱 그런 듯하다. 이럴 때는 얼른 걸음마를 끝내고 뛰고 날아다니는 수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얘기 말고 다른 이야기, 다른 이들을 관찰한 이야기나 누군가 들어서 위로가 될 이야기들을 맛깔나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때가 되면 ‘나는 너를 알고 있다’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까 두렵지 않을까?


혹시나 그런 일이 생겨 글을 그만 쓰고 싶어 지는 날이 올까 지레 겁을 먹고 만다. 괜스레 설레발치며 이런 말을 전하고 싶어 졌다.


저를 알아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아는 척은 하지 말아 주세요.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나 봅니다.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쓸데없이 있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두려워하고 마는 걸음마 중인 작가 올림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당황스럽기만 할지 기쁜 마음이 들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어준다면 우선은 좋지 않을까? 그전에 읽고 싶은 글부터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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