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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콕맘 예민정 Feb 26. 2021

날지 못하는 새

빼앗긴 본능

며칠 전, 운전 중에 비둘기 한 마리와 마주쳤다. 사람도 차도 제법 있는 곳이라 알아서 날아오르거나 피할 거라 생각하며 속도를 줄였다. 예상과는 다르게 빠른 걸음으로 뒤뚱거리며 도로 위를 방황하기만 했다. 잘못하면 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섰다. 비둘기가 도로를 벗어나는 걸 확인하려다 이상하게 눈길이 가서 한참을 지켜봤다. 비둘기는 어떤 상황에서도(이후에 사람도 마주치고 다른 차량도 마주쳤지만) 날갯짓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푸드덕 한 번이면 조금 더 빠르게 자리를 이동할 수도 위험을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비둘기는 걷기만 했다. 마치 날개가 묶인 듯 뒤뚱거리는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Photo by Ivan Borinschi on Unsplash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뛰어놀 수 있는 아이들이 일 년 넘게 집에만 갇혀 지내는 중이다. 아쉬운 대로 집에서 뛰고 소리를 지른다. 모두 너그러운 이웃들의 이해와 배려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누우나아~~~”

“끼야~~~”

“꺅!!”

"아아~~~~!!!!!!"

“피슝~~~”


즐거워서 내는 소리, 화가 나서 내는 소리, 신기해서 내는 소리, 흥이 나서 내는 소리. 호기심에 내는 소리.

아이들이 내는 소리는 다양하다. 가끔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지만 일 년 넘게 쉬지 않고 바로 곁에서 들으니 귀가 아플 지경이다. 나도 모르게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말았다.


"조용히 해!!!!"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나는 짜증과 분노가 많은 사람이다. 대부분 자극에 성급하고 과민하게 반응하고, 조금만 거슬려도 분노를 쏟아낸다. 

지인이 전달해 준 번아웃 증후군 테스트에서는 전기뱀장어라는 결과가 나왔다. 겉으로 괜찮은 것 같지만 건드리면 쏠 준비가 되어 있단다. 너무도 정확한 결과에 정말 깜짝 놀랐다. 

어쩌다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이 됐을까 생각해 보는 계기가 생겼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찾아준 동영상에서 이슬아 작가가 이런 말을 한다.


“다솔이는 화를 내면 정말 무서워요. 필요한 만큼 볼륨을 내서 소리를 낼 줄 알거든요. 그런데 저는 화가 나도 언성을 높여서 화를 내는 게 되게 힘이 든단 말이죠. 그에 반해 다솔이는 필요하면 분노를 그에 맞는 성량과 함께 낼 수 있는 사람이죠.”


덧붙여진 설명에 따르면 여자들끼리 모여서 몸을 굴리고 소리를 지르는 연습을 하는 공간이 따로 있을 정도라며, 성 정체성이 생기는 청소년기부터 여자들이 얼마나 몸을 쓰지 않고 소리를 낼 일이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적절한 볼륨으로 의견을 피력할 기회가 없긴 하다. 어릴 때는 ‘어린이’라 어른에게 대든다며 말문이 막혔다. 조금 커서는 ‘여자’가 어디 큰 소리를 내냐는 핀잔을 들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자식’이니 말을 하면 말대꾸가 되었고, 사회에 나가서는 ‘신입’이 뭘 안다고 떠드냐며 무시를 당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목소리를 마음껏 써볼 일이나 있었을까?


유년기를 제외하고 목소리를 최대치로 사용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안 되는 것 투성이인 사회에서 꾹꾹 담아두기만 한 것들이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고 ‘강자’가 되니 다듬어지지 못한 채 툭툭 분노로 터져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아이들은 괴성을 내지르다 깔깔 웃다가 꽈당 넘어지고 으앙 울면서 노는 중이다. 운동장에서 뛰고 구르지는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뛰고 뒹굴면서 몸을 쓰고 목소리를 낸다. 

문득 아이들만큼은 충분히 몸과 마음과 목소리를 쓰면서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벌써부터 잦은 짜증과 분노를 나처럼 토해낼 때가 있는 첫째가 있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얼마나 마음껏 하도록 허용할 수 있을까? 민폐가 끼치지 않는 선, 곁에 선 양육자가 괴롭지 않은 선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이 선조차 지워야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없다.


어찌 되었건 몸도 목소리도 충분히 사용해 봐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 듯하다. 그런 측면에서 아이들은 지금보다 좀 더 마음껏 소리를 내어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적절한 볼륨으로 낼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날지 못하고 이상하게 뒤뚱거리던 비둘기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몸과 목소리를 제대로 쓰는 법을 빼앗긴 우리가 투영되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야, 너희들의 목소리를 지켜주기 위해 좀 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슬프게 시선을 끄는 비둘기가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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