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엄마의 무엇을 인정하길 바라는가?
"아빠는 똑똑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모르면서!!!!"
사건의 시작은 이랬다. 그날따라 만쥬가 드시고 싶으시다던 큰 상전(딸)의 요청이 있어 남편은 퇴근길에 만쥬 두 봉지를 사서 귀가를 했다. 코로나로 외출이 줄어든 아이들은 요즘 남편의 퇴근길에 마중을 나간다. 집 앞 대로에서 만나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나 즐거운 일인지. 아빠를 만난 것이 반가운 지 만쥬가 반가운지 알 수없던 그 날. 딸아이는 집까지 돌아오는 그 짧은 길에 여섯 개의 만쥬를 드셨다.
몇 차례 이야기했지만 딸아이는 입이 굉장히 짧다. 편식도 심해서 식사 시간에 싫은 소리를 하게 되는 날이 더 많다. 그런 아이가 저녁 먹기 직전에 만쥬 6개를 먹었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남편은 개수가 늘어갈수록 아이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이만큼이나 먹고 저녁 잘 안 먹으면 안 돼. 저녁 잘 먹을 거야?" 확인을 하고 주었지만 속수무책. "잘 먹을 거야! 잘 먹는다니까!" 하는데 당할 재간이 없다. 그렇게 아빠는 또 뻔한 거짓말(당시에는 진짜 잘 먹을 생각이었겠지만)에 속았다.
그렇게 만쥬 6개를 먹고 저녁 식탁에 앉은 아이의 첫마디는 "배 아파."였다. 순간 나도 울컥했으나 이번엔 남편이 빨랐다. "그러게!!!!!"
화를 버럭 내고 보니 아직 저녁밥을 한 숟가락도 먹지 않은 상황임을 인지한 아빠가 상황을 수습해본다. 달래주는 상황으로 바뀌고 나니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프다는데, 아플 수도 있지, 걱정해주고 엄마손은 약손이라도 해 주리라 믿었건만. (과정은 모르겠고) 얼마나 서러웠을까.
울어버린 것까지는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뒤이어 터져 나온 아이의 외침이 뇌리에 박힌다. "배가 고파서 배가 아플 수도 있지. 아빠는 똑똑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모르면서!!!!"
남편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이게 당최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배가 너무 고파서 만쥬를 먹었더니 배가 아프다는 논리로 말을 했던 것 같다. 어른들도 배가 너무 고프다가 뭘 먹으면 위가 아픈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아이 입장에서는 그런 것도 모르는 아빠가 꽤나 원망스러웠던 모양이다.
며칠이 지나고 지나가는 말로 아이에게 물어봤다.
"쌩쌩이는 엄마가 똑똑하다고 생각해?"
"응."
"왜 그렇게 생각해?"
"음. 엄마는 어릴 때부터 계속 공부했고 지금도 책 많이 읽고 공부하고 있잖아."
"그럼 아빠는 왜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해?"
"아빠는 맨날 게임만 하니까."
"아빠도 핸드폰으로 책 많이 보는데?"
"그래도 게임을 더 많이 해."
아이의 눈에는 늘 공부하는 엄마는 그냥 똑똑한 사람인가 보다.
무엇인가를 배우는 학생의 신분이 발휘하는 힘은, 단지 배운다는 사실이나 그 기간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그 힘은 자기의 에고와 야망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선생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에고가 작동할 수 있는 상한선이 생긴다. 이때 학생은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에고가 날뛰지 않으니 학생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겉치레가 아닌 진심이다.
<에고라는 적> p.67
남편과 학습에 있어서만은 따로 기관을 보내거나 학교에 의지하는 것이 좋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과 배움에 있어 완벽한 신뢰를 보내는 것(완벽한 굴복)은 결이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결국은 배우는 아이가 가르침을 주는 부모를 학습 과정에 있어 얼마나 인정하고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었느냐가 관건이다. 부모가 교육하는 것에 한계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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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 대한 존경, 무한한 신뢰 그리고 배워야 한다는 완전한 인정. 이런 것들이 학습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면 부모가 아이의 학습을 주도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부모가 어느 수준만큼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일까?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도 본인도 모르게 부모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 물론 아이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닌 건지도 모른다. 가령 "엄마는 이런 운동을 하면 너무 힘들걸?" 이라며 '엄마는 체력이 나보다 못해'라는 생각을 내비친다. 어쩌면 그 날의 '똑똑하지 않은 아빠'도 그런 차원이 아녔을까.
생각해보면 남편은 무언가를 아이에게 설명하거나 알려주는 것에 '나는 월등히 너보다 똑똑해.' 하는 뉘앙스를 풍길 일이 없었다. 실제로는 많은 질문에 즉답을 해주고 있고 올바른 사실들을 알려주고 바로잡아주고 있음에도 말이다. 반면 나는 대부분의 물음에 "글쎄, 왜 그럴까?" "그게 뭘까?" "한 번 생각해볼까?" 등으로 단번에 답해주는 일이 거의 없다. 가능하면 정확한 정보를 인터넷 등에서 찾아서 알려주려고 하거나 같이 찾아보고 실물을 보기 힘들다면 사진이라도 보게 하는 쪽이다.
언뜻 생각하기엔 무엇이든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주는 아빠가 되묻는 엄마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할 것만 같다. 정확한 이유는 찾을 수 없지만(아이가 제시한 근거가 전부라고 볼 수 없기에) 얼마 전 아이와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서 짐작해 본다.
정확하게 아이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가 뭔가를 물었고, 나는 늘 하던 것처럼 '뭘까?'라고 대답했다. 아이가 대답을 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잘못 알고 있기에 바로 잡아줬었다. 그랬더니 "엄마는 알고 있었어?"라며 확인을 한다. "그런데 왜 모르는 것처럼 다시 물어봤어?"
좀 당황스러웠다. 2000% 진심을 담아 '귀찮아서'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때 나의 설명은 "응~ 엄마가 알고 있기는 해도 쌩쌩이가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엄마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정도였던 것 같다.
그 후로 아이는 나의 되물음에도 엄마는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알지만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쩌면 이런 과정들이 아이가 엄마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아닐까?
우리는 오랜 배움 속에서 모호함이나 역설과 씨름한 후에야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곳에 가 닿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깨달음, 지속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겸손만이 우리를 거기에 데려다준다. < 에고라는 적 > p.71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한다는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내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누군가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나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제 큰 걸림돌 하나를 내려놓아야 할 때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의 뛰어남을 인정하는 과정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에는 아이나 어른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 과학 선생님 한 분이 웬만큼 똑똑한 친구보다도 교수법이 형편없었다. 분명히 그 선생님만의 장점과 배울 점이 있었을 텐데, 단지 똑똑해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의 대부분 학생이 수업시간에 딴짓을 했다. 아마 우리가 그런 학생의 처음이 아녔기에 선생님도 당연히 받아들이셨는지 딴짓하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렇게 한 공간에서 선생님은 선생님의 수업을, 아이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나는 주로 그 시간에 숙제를 베꼈다.)
마음속에서부터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니 그 선생님이 알려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그 과목은 독학하다시피 했고 전교생을 통틀어 그 과목을 선택 과목으로 정한 학생은 전학생 딱 한 명뿐이었다.
부모가 되어 아이를 길러보니 어려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모가 아이 인생에 있어 모든 영역에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거다. 그런 능력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에게 어떤 부분을 인정받는 부모가 될 것인가? 선생님을 대신할 정도로 똑똑한 부모로 남을 것인가? '엄마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어' 할 만큼 인격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엄마 같은'이 내포하는 의미는 어떤 부분일까? 성격적인 면인가? 끊임없이 배우는 모습인가? 살림을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일까?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정확히 무엇일까? 여기에서도 에센셜리스트의 역량이 필요한 듯하다. 모두 할 수 없다면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이제부터 고민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