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엄마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지금은 다니지 않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엄마 품에 안겨 교회에 나갔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주일학교에서는 따라 부르기 쉬운 찬송을 같이 부르며, 교회의 교리를 익혔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라는 어린이 찬송가가 있다. 찬송가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모두 사랑해’라는 가사로 끝이 난다. 이 찬송가는 따라 부르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두 살 많은 언니는 언제나 미웠고, 자주 다퉜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싸우다가 화분을 깨부순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언니와 죽어라 싸웠다. 아무래도 나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어린이는 못될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서도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나이가 들어서는 시기와 질투가 더 많이 느낀다. 고백하건대 나는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같은 연구실의 선배가 몹시도 부러웠다. 어쩜 저렇게 연구를 뚝딱뚝딱 잘 해내지? 새로운 아이디어도 마구 만들어내고, 그리고 필이 꽂히면 또 죽어라 해서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의미를 도출해 냈다. 나도 선배처럼 연구를 잘하고 싶었다. 부러우면서도 그런 선배가 밉기도 했다. 하루는 더 나이가 많은 연구실 선배가 질투하는 내 마음을 콕 집어주었다. 나의 못난 마음을 들킨 게 부끄러웠다. 내가 질투했던 선배처럼 나도 잘하고 싶었다.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석사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니 선배에 대한 질투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더 이상 선배와 나를 비교하지 않게 되었고, 선배의 논문이 통과되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어쩜 그렇게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누구는 이걸 잘하고, 누구는 저걸 잘하고, 또 누구는 이걸 하면서 저것도 하고, 부러워하자니 한도 끝도 없었다. 어떨 때는 남자친구조차 질투의 대상이었다. 내 남자친구이니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할 일인데 말이다. 이렇게 다른 이들을 부러워하는 내 모습이 너무 못나보였다. 실력은 없으면서 남들을 시기하기만 하는 못난 인간 같았다. 이렇게 못난 인생이라니, 무언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내 이야기를 들은 어떤 이가 ‘잘하고 싶으니깐 그런 거지’라고 얘기해 줬다. 또 열등감은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며, ‘열등감은 나의 힘!’이라고 외쳤다. ‘실력은 없으면서 다른 이들을 시기하기만 하는 못난 인간’과 ‘잘하고 싶어 하는 인간’ 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었다. 두 표현 모두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언어였지만, 어조나 표현의 방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다. 어쩌면 내가 잘못하고 있는 점은 부러워하는 마음 그 자체가 아니라 나 자신을 못나게 생각하는 태도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 자신을 좀 더 믿어줘야겠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한 가지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어째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마음까지 번지는 걸까? 그건 나는 어쩌면 저렇게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못하는 것을 저 사람은 해내니깐 그게 미워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만 잘하고 싶은 못난 욕심쟁이이다. 아니 아니, 이렇게 사람은 쉽게 안 바뀐다. 못난 욕심쟁이가 아닌,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되뇌어야겠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사랑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