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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Jan 28. 2021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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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가 찾아왔다. 내 생일날 아내가 나의 생일선물이라고 준 가늘고 긴 종이박스 안에는 붉은 두 줄의 선이 분명한 임신 테스트기가 있었다. 아내는 하나님께 나의 생일선물로 아기를 달라고 기도해 왔다고 한다. 아내도 내 생일 당일 날 아침에 처음으로 임신 테스터기로 임신을 확인했다. 그 후에 병원에 가서 임신을 확인했다. 오늘로 7주 5일 차이니 거의 8주가 되어 간다.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좋은 아빠 엄마가 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임신을 하기 전에도 평소와 다르게 밤에는 잘 못 자고, 아침에는 늦게까지 늘어지게 자서, 아내의 몸에 무슨 변화가 생겼구나, 아기가 온 것 같다는 예감은 하고 있었다. 생리가 얼마나 지났는지 아내에게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내의 변화로 임신 테스터기로 확인을 하기 이미 전에 좋은 소식을 예감하고 있었다.


임신 아주 초기에는 평소보다 음식을 더 맛있게 잘 먹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더니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입덧을 하면서 구토하면서도 먹을 것은 맛있게 먹길래, 나는 입덧은 하지만 음식은 당긴다고만 생각을 했는데, 아기를 위해서 엄마로서 억지로 먹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입덧이 더 심해졌다. 먹기만 해도 토를 했다. 배고프고 힘이 없으니 아기와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데, 먹으면 토할게 두려워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작은 냄새도 신경이 쓰이고, 물만 먹어도 입덧을 한다. 아빠가 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닌데, 엄마가 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쉬운 것이 아닌 것 같다. 아기를 임신하고 입덧으로 아픈 아내를 보면서, 나의 어머니와 세상의 모든 엄마들의 위대함을 생각해 본다. 엄마들은 아기를 낳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아파야 한다.


내가 옆에서 지켜본 입덧을 하는 여성은 중증 환자와도 같다. 요즘 아내의 모습을 보면 많이 아픈 환자와도 같다. 기분은 대체로 우울해 보이며, 신경은 평소 같지 않게 곤두서 있다. 예민해지고 불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아직 임신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지 않았으니 전체 과정은 잘 모르지만, 입덧 시기와 아기를 낳는 시기가 제일 힘든 것 같다. 임신 내내 입덧을 하는 산모도 있고, 입덧을 안 하는 산모도 있다고 하지만, 대개는 3개월 정도 선에서 입덧을 하는 것 같다. 인터넷으로 서치한 결과 아내는 아주 심한 입덧은 아닌 것 같고, 평균치의 입덧인 것 같다. 그 평균치의 입덧이라는 것이 중증 환자를 보는 것만큼 아주 고통스러운 증상인 것 같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그렇게 아기들을 자신의 몸에 품고 낳는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귀농하셔서 논산 시골집에 내려가셔서 거의 올라오지 않으시는데, 처리할 일이 있으셔서 잠시 수원 집에 올라오셨다. 아내 먹으라고 비싼 애플망고를 사 오셨다. 다른 음식들은 아들도 같이 먹되, 비싸고 귀한 애플망고는 임신한 며느리만 먹으라고 사 오셨다. 에미마가 내 입에도 슬라이스한 애플망고를 넣어 주었다.


"에미마, 애플망고는 에미마가 다 먹어. 그런데 애플망고 엄청 맛있네. 엄청 맛있는데 우리 사랑이 엄마가 다 먹어."


우리 아이의 태명은 사랑이이다. 사랑이 사랑아 그렇게 부른다. 2019년 말에 임신했었으나 유산된 아기의 태명은 축복이라는 뜻의 블레싱이었다. 아내가 지었다. 내 생일날 내 생일선물로 아이가 온 사실을 알고 나는 아내에게 아기 태명을 지으라고 했더니, 아내가 이번에는 내가 지으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라고 짓고, '사랑아'라고도 부른다.


우리가 블레싱을 유산했던 같은 시기에 동생 부부도 첫째 아기를 임신했었는데, 앵두라는 태명의 아기는 다솔이라는 아기로 지금 귀엽게 잘 자라고 있다. 우리보다 약간 먼저 둘째를 임신했는데, 우리가 서운해할까 봐서 우리에게는 그동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동생 부부와 그들의 아기 소식을 들으면 오히려 즐거운데 말이다. 우리는 동생 첫째 아들 다솔이 사진을 보면 너무 귀엽고 행복해지는데, 동생 부부는 우리가 섭섭해하고 서운해할까 봐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아들 사진은 자주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동생 부부의 첫째 아기의 태명은 앵두였고, 지금 뱃속의 둘째 아기의 태명은 자두이다.


"에미마, 사랑이 엄마가 다 먹어." 하면서도, "어, 이 애플망고 엄청 맛있네." 하는 내 입에 에미마는 슬라이스한 애플망고를 여러 개 넣어 주었다. 나와 동생이 귀염둥이 어린 시절, 우리는 빵집에 가면 직접 빵 사달라고는 안 했다고 한다. 다만, "엄마, 빵 냄새가 맛있네." 그랬다고 한다. 그러면 빵을 안 사줄 수 없었다고 한다.




한동안 프리랜서로 책 하나를 재판하는 일을 했다. 표지와 내지를 다 하기로 했는데, 표지는 계획이 바뀌어 출판사에서 하기로 했다. 고모 출판사에서 낸 책인데, 누가 그 책을 도용해서 출판해서, 소송을 하는 대신에, 고모 출판사에서 그 책을 절판하고 도용한 그 책으로 고모 출판사에서 재출간하기로 한 것이다. 고모가 번역한 책을 도용한 책의 pdf 파일을 그대로 긁어와서 똑같은 책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원본 파일이 없고 pdf로만 있어서, pdf 문서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를 가져와서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Ctrl X Ctrl V의 복사 붙이기 작업만은 아니었다. 텍스트와 이미지만 가져오는 것이지, 자간 행간 배열 등은 내가 책과 동일하게 다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대로가 아니라 교정을 보고 수정하여 만드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교정한 내용을 고치는 작업이었다. 내가 레이아웃을 직접 창의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뿐이지, 책의 레이아웃 대로 내가 레이아웃을 만들고, 북디자인하는 과정을 다 하는 경험의 시간이었다.


고모도 나도 돈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일을 시작했다. 모르는 관계라면 돈 이야기부터 하고 일을 시작해야겠지만, 신뢰할 수 있는 가족 간에는 일단 일 하고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고모가 조카에게 신의성실로 대할 것을 나는 믿고, 또 고모가 많이 주고 싶어도 출판사 기준대로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파일을 출판사로 넘기고 고모가 출판사 기준이 있는데 얼마나 줘야 할까 물으셨다. 몇 시간 일한 것을 해야 하나 물으셨다. 프리랜서 북디자인이란 게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집중해서 할 때는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일하면서도, 여유롭게 할 때는 놀면서 하니까 말이다. 또 압축적으로 일했다고 빨리 일하는 것도 아니고, 여유롭게 일한다고 느리게 일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고모에게 저는 기회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출판사 내부 규정대로 해주셨으면 한다고 카톡을 보내드렸다. 그러면서 내가 알기로는 프리랜서는 시간으로 계산하지 않고, 1건 프로젝트 전체로 계산을 한다고 알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같은 분량의 같은 난이도의 책을 나와 같은 초보 디자이너에게 외주로 줄 때 출판사에서 주는 액수에 맞추면 되지 않을까 말씀드렸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임금 협상에서 내가 실수를 한 게 하나 있다. 다른 것은 다 괜찮았는데, '초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 말이다. 출판사 내규대로 해주시면 될 것 같은데, 같은 분량의 같은 난이도의 책을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외주 줄 때 주는 출판사 기준대로 해달라면 되었다. '초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었다. 디자인 일이라는 게 '초보'나 '경력'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만족하는 만큼의 퀄리티만 보장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한 일이 고모의 출판사 디자이너가 더 빠르게 더 잘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내게 일이 온 것은, 계획하지 않았지만 짧은 기간에 진행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고모의 책을 도용한 측에서는 고모의 출판사에서 자기가 고모가 번역한 책을 짜깁기 하여 재편집한 데로 책이 나오되 가능한 빠르게 나오기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작은 출판사이고 현재 코로나로 어려우서 존폐의 고민을 하면서 최소한으로 인력을 줄인 출판사이지만, 지속적으로 출판할 계획이 잡혀 있어서 출판사 직원들이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 일이 온 것이다. 내가 '초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고 하여 고모가 내 품삯을 깎을 리는 없지만,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낮출 필요가 없었다. 디자인에서는 초보와 경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결과에 대해서 출판사가 책정하는 임금만큼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또 나는 정직원이나 비정규직이나 알바가 아니라 프리랜서 형태로 작업을 한 것이기 때문에 시급이 아니라 같은 분량의 같은 난이도의 책 한 권 분량이나 프로젝트 단위로 품삯을 받으면 된다. 시급으로 계산하게 되어 있다면, 보통 외주 디자이너들이 그 정도의 책을 작업하는 시간만큼으로 계산을 해주면 된다. 고모께 기회만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그런 저런 내 생각에 대해서 물어보시니 대답드렸다. 처음부터 품삯은 생각하지 않고, 그것은 고모가 알아서 하실 일이고, 나는 고모가 주신 일에 대해서 고모를 도와드리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내와 나는 일하면 고모가 당연히 알아서 돈은 챙겨 주시겠지 기대는 했지만 말이다.


고모의 일이 끝나니까 동생 사업장에서 정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 2~3달은 한 달에 60시간, 그 후에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되면 풀타임으로, 그렇게 일하도록 계약서를 썼다. 그동안은 동생이 필요할 때 가서 알바 형식으로 일했는데, 이제는 정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동생 일을 할 때 일을 한다기보다 형제간에 필요할 때 돕고 사는 정도여서 지금까지는 계약서 없이 일을 했는데, 가까운 사이에도 계약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쓴 것은 아니고, 계약서를 안 써도 될 만큼 가깝고 신뢰하는 사이지만, 법적인 의무와 서로 간의 필요에 따라서 쓰게 되었다. 4대 보험도 동생은 사업자로서의 법적 의무로 필요해서 들어주게 되었고, 나는 나대로 네팔인 아내 에미마가 나중에 한국인으로 귀화하거나, 아니면 임대아파트를 분양받게 되거나 할 때 등을 위하여 4대 보험을 들기를 바랐었다. 당연히 일을 하면 4대 보험을 들어야 하겠지만, 그동안은 알바 정도의 일을 했지만 일을 한다기보다는 서로가 필요할 때 서로를 도와주는 정도라서 4대 보험을 안 들어왔는데, 정식으로 일하게 되면서 정식으로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형제끼리 필요할 때 서로가 돕고 사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법적으로 정식으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가 되었다. 동생 비즈니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다. 동생이 직원이 필요해서도 이지만, 직장이 없는 형을 위해서 그동안 형편이 되면 풀타임으로 나를 고용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동생 아내인 제수씨도 기쁜 마음으로 동의를 해주었으니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지독한 짝사랑과 군대에서의 집단 괴롭힘으로 오랜 기간 동안 방황을 하다 2030의 청춘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가족의 사랑으로 살아간다. 나의 앞으로의 삶은 나와 같이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어렸을 때 나의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는데, 많이 아프고 오랜 방황을 하다 보니 오히려 내 안에 욕망이 들끓어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것으로 세상에 복수를 하고 싶었다.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이 모두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오히려 그럴수록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성공에 대한 욕망이 들끓기도 한다. 


물론 지금도 성공, 부와 명예가 오면 좋겠지만, 지금은 아내와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우며 희망의 증거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 삶을 살다 보니 돈이 따라오면 좋은 것이고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모두 내가 목사님이 될 줄 알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재수하기 전에 사실 총신대학교 신학과 원서를 썼었다. 언젠가 브런치에도 썼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신학과 원서를 영어교육과로 돌리고,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추가합격으로 붙었는데도, 총신대가 바로 뒤 숭실대 화장실보다 작아서 대학교 같지 않아서 못 가겠다는 이유로 안 갔다. 올해부터는 동생 회사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하며 아기를 잘 낳아 아내와 사랑으로 키우고, 내년에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면 방배역의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야간으로 신학을 공부하며, 낮에는 동생 사업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신학을 공부할 것이다. 신학교 졸업 이후에는 일과 사역을 병행할 생각이다. 일을 하며 한국에서 사역을 할 수도 있고, 아내와 아내의 나라 네팔에 가서 사역을 할 수도 있고, 그 길은 열어두기로 했다.


일과 사역을 해도, 기본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유튜브를 하는 것은 계속할 것이다.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유튜브를 하는 것이 Job이 되고 일이 되면 좋은데, 그것은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증거가 되면 좋겠다. 며칠 전 조울증을 앓고 있는 누군가가 나의 네이버 블로그의 비밀 글을 남기고, 나에게 카톡으로 연락을 했다. 네이버 블로그 모바일 버전에 전화번호를 올려놓았는데, 그 번호를 알고 카톡을 보냈던 것 같다. 나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 도움이란 것이 금전적인 것이나 직접 오프라인 상에서 만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카톡으로 며칠 동안 잠깐 대화를 나눈 정도였던 것 같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니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는가 보다. 나는 조울증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약을 먹고 있으며 아직 직장과 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외에는 조울증에서 빠져나온 상황이고, 그 친구는 조울증 한가운데 있는 상황이고 말이다. 나에 비해 조울증에 걸린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한참 어린 친구였다. 처음에는 그 친구는 자신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다며, 나는 조울증 환자이지만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겪고 아팠던 시간들 세상이 나를 이해할 수 없었던 시간들을 다 이야기해 주고, 희망을 잃지 말고 버티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해주니, 희망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공감은 되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나의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지금 나의 꿈과 사명은 아내 에미마를 사랑하고, 아내의 뱃속의 아기 사랑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사랑과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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