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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4. 2020

나의 유년 시절

착하고 순수했던 어린이는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노회한 아저씨가 되기도 한

아내 에미마의 폰을 갤럭시 노트 20으로 바꿔주기 위해 간 대리점에서 ⓒ 최다함


유년 시절

나의 애인은

엄마였다


사랑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사랑은 우리를 슬프고 쓸쓸하게 만든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부부교사셨다. 초등학교에서 같은 학교 동료 교사로서 만나셨다. 부모님께서 결혼하시면서 수원에 터를 잡으셨다. 어머니 출산 때 돌보아 주실 이모집이 서울이었는지 서울의 유명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지만, 사실 상 내 고향은 수원이다.


어머니께서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일하시는 것보다, 조금 가난하더라도 저와 동생을 직접 키우시고 싶으셨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가난한 농부의 3남 4녀의 장남이셨다. 지금과 달라 얼마 되지 않았던 정말 박봉의 교사 월급으로, 아직 어린 동생들을 가난한 농사꾼 할아버지와 함께 키우고 공부시켜야 했다. 어머니께서 할아버지께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 동생을 직접 키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할아버지께서 "그럼 어린 시동생들은 누가 키우냐? 안 된다." 고 하셨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후에 어머니께서는 왜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을까, 그냥 그만두고 아이들 키울 걸 하셨다. 우리 집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어머니 아버지 젊은 시절 때 시대상이 그랬었다.


가난한 시댁과 시동생까지 돌아보시기 위해 어머니께서 직장에 다니셔야 했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는 아직 어렸던 고모를 저와 동생을 돌보라고 우리 집으로 보내셨다. 어머니께서 학교에 출근하실 때마다, 나는 아파트에서 1층까지 따라 내려와 어머니 바지를 잡고 통곡하며 울었다. 한 번 안아주었더니 떨어지지 않고 울어서, 어머니께서 안아주고 싶어도 그 이후에는 안아주시지 못하셨다. 학교 가시는 어머니에게 내가 문방구에서 사표 사 오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 일 가실 때 통곡하며 울다가, 가시고 나면 아마도 고모랑 잘 놀았을 텐데, 어머니께는 그런 제가 안쓰러우셨다. 다른 아이들은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고 잘 노는데, 나는 어디만 가면 어머니 바지폭을 붙잡고 집에 가자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강했던 것 같다. 이성에 눈을 뜨면서는 사랑하는 한 여자에 대한 애착이 다른 평균의 남자들보다 강했다. 특별히 내 심리가 병리적이었다기보다는,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보다, 한 사람과의 아주 친밀한 애착을 필요로 했다.





섬 백령도에

살았었다


너무 맑고 순수한 영혼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착한 것도 정도껏 착해야지, 너무 착하면 등신 취급받아 눈 뜨고 코 베인다.


유치원 때나 초등학교 1, 2 학년 때 일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옆 집 여자 아이네 집에 고모와 함께 놀러 갔다거나, 가끔 어머니나 고모를 따라 놀러 갔던 또래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런 몇 컷의 사진 정도의 기억은 있다. 3학년 되던 때에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섬으로 발령받아 가셨다. 지금은 어떠한 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벽지 점수가 있어서 선생님들이 섬에 가면 승진에 유리한 점수를 받았다. 또 자녀가 어릴 때 시골살이를 하면 정서에 좋지 않을까 싶어서, 젊은 부부교사 선생님들이 자녀가 어릴 때, 점수도 딸 겸 자녀들 시골의 순수한 정서 속에 교육도 할 겸, 시골 벽지로 발령받아 가셨다. 3학년 때 영흥도에서 1년 살고, 4학년에서 6학년 3년은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서 살았다. 영흥도는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차 타고 가지만, 그 당시는 배 타고 들어갔다. 백령도는 군인이 반, 주빈이 반인 섬으로서, 대한민국보다 북한이 훨씬 가깝다. 북한이 바로 코 앞이라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북한 주민의 이동까지 육안으로 볼 수가 있다. 


시골의 순수한 정서 속에서 어린 우리의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 주시겠다며, 섬에 들어가신 부모님의 선택은 좋은 선택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섬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어머니께서 붙잡고 공부를 시키셔서, 초등학교 내내 1등 2등을 앞다투었다. 한 학년에 반이 하나고, 시골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섬에서도 부모님이 외지 출신이거나 섬 토박이라도 부모님이 어부나 농부가 아닌 백령도에서 KT 직원이나 KBS 직원으로 근무하시는 분들의 자제들은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께서 옆에 끼고 공부를 시키며 어머니께서 직접 나를 개인과외를 해주셨기 때문에,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기는 했다. 초등학교 부부교사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DNA도 어느 정도 공부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을 테고 말이다. 개발을 못 한 것이지, 타고 난 머리는 좋은 것 같다.


섬이라서 1, 2등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중학교 올라가서 초등학교 때 배웠던 내용으로 시험을 본 첫 배치고사에서 저는 전교 10등 안에 들어갔다. 내가 다니던 안양의 중학교는 섬과 달리 학생수가 많았다. 물론 그다음 중학교 첫 공식 시험 중간고사에서 바로 반에서 10등 정도로 떨어졌다. 중학교 내내 반에서 10등을 맴돌다가, 반에서 10등 정도면 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갔다. 비평준화 시절이었고, 한 반에 50명이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반에서 10등 정도면 공부를 못한 것도 잘한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 가자마자 처음 친 배치고사에서 전교 10등 안에 한 번 진입한 후, 중학교 내내 반에서 10등 언저리를 맴돌다가, 반에서 10등 정도 하는 아이들이 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거기서 반에서 10등을 맴돌다가 졸업하였다. 내가 다니던 평촌고의 위상을 아는 사람들은 좋은 학교 갔다고 하지만, 공부 못 하거나 안 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명문고등학교는 아니었다. 우리 집 아파트 단지가 학교 코 앞이라 나에게는 좋은 학교였다. 


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을 무겁게 들고 다니고, 쉬는 시간에도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고, 손에서 팬을 놓지 않았지만, 머릿속 멘탈은 다른 곳으로 가출한 그런 학생이었다. 나를 공부벌레라 노력파라고 생각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사실 논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고3 때는 전국 석차 상위 15% 정도를 하고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추가합격을 했는데 재수하여 포항의 한동대에 가보겠다고 안 갔다. 재수할 때는 전국 석차 상위 9% 정도가 되었는데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한동대 합격선에 약간 모잘라 떨어졌고,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합격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섬에 살다 오면서 도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중학교 공부를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그 이후 공부하는데 다소 뒤처졌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께서 옆에서 직접 공부를 관리해 주셨는데, 중학교 올라가면서 손을 떼셨다. 학원이나 과외를 어쩌다 필요할 때 잠깐 하고는 했지만, 사교육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다. 사교육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기 보다도, 내가 학원이나 과외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억지로 보내시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때처럼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것은, 어머니께서 더 이상 옆에서 끼고 관리해 주시지 않으셔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학원이나 과외를 하지 않아서 그랬었던 것도 아니다. 자기 주도 학습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공부로 그 정도면 괜찮은 대학에 간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때 공부로 대학에 갔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맑고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


선한 것도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


어린 시절 나는 착하고 순수한 영혼이었다. 어머니의 교육대로 세상 대중가요 대신에 크리스천 뮤직 찬송가와 동요와 클래식만 듣고 불렀다. 동생은 이에 대한 반발이 다소 있었지만, 나는 그 당시 K POP은 재미가 없었고 CCM 크리스천 음악이 재미있었다. 학교에서 혼자 쓸쓸히 노는 친구가 이어폰으로 헤비메탈을 들으면, 그 친구와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해서 같이 한쪽 이어폰을 듣고 친구가 듣는 헤비메탈을 같이 들어주기도 했지만,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CCM 동요 클래식을 스스로 좋아해서 그런 류의 음악만 들었다.


길거리에 동냥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머니를 털어서 주었다. 잘 걷지 못하고 목발을 짚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서 도울 방법은 없는지 찾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닌데, 비닐봉지 들고 동네 길에 나가서 스스로 쓰레기를 주워 담아 동네 청소를 했다. 집에 갈 차비가 없는 지저분한 거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집에 데려가 씻기고 먹을 것을 주고, 주머니의 가진 돈을 털어 보낸 적도 있었다.


호기심 많은 또래 소년은 야한 잡지나 야한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보았다. 지금은 야한 동영상이라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아직 인터넷이 발달되기 이전 시대라, 동영상이라고 부르지는 않았고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보았다. 비디오테이프 제목란에는《수학의 정석》이런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것도 한 때이고 성장과정 가운데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나는 그런 것을 친구들이 보고 있으면 피해 가서 보지 않았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때 야한 것들을 친구들이 돌려 볼 때는 나는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는데, 갈라진 손가락 사이로 살짝살짝 살색의 무언가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노골적인 음란물을 통해 사춘기 때 성적 에너지를 충족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서 소장하고 계시는 클래식 명화집의 그림 속의 야한 예술 그림들을 보며 청소년기의 성적 호기심을 충족하였다. 노골적인 야한 동영상 대신 스토리가 있는 야한 예술영화를 보았다. 대놓고 다 보여 주는 음란물보다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오기 같은 야한 예술작품에 끌렸다.





어린 시절


어릴 때 나의 숙제는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성자가 되는 것이었으나
지금 나의 숙제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어울리는 하나님과 교회를 존중하는 세속인인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주변에 어른들 가운데서도 나를 존경한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다. 내 친구 가운데서도 내가 스스로 왕따였다고 기억하는 친구도 있는데, 깊이 교류하는 관계는 부모님 정도밖에 없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였다. 나도 거의 모든 사람을 좋아했고, 거의 모든 사람도 나를 좋아했다. 만인의 연인이 반드시 좋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때 그 시절 내가 만인의 친구였었지 않나 하고 기억한다.


학교에서도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지만, 특별히 무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왕따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의도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어머니 아버지께서 설계해주시고 프로그램해 주신 어린 시절 제 세계관이 그랬었던 것 같다.


주일학교 예배 외에도 교회의 성인들이 받는 1대 1 제자훈련에도 참여하여, 교회 부목사님으로부터 제자훈련 성경공부를 받기도 했다. 친구 중 하나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전하면서, 친구에게 성경공부를 해 주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학교에 선생님으로 근무하시면서, 학교 동료들과 학부모들과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노력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전도를 위해서 1번에 카세트 5개 이상을 동시에 고속 복사하는 카세트 복사기를 개인 집에 들여놓으셨다. 또 전도편지를 복사하기 위해 컴퓨터 프린터기가 아니라 오피스에서나 쓰는 복사기를 가정집에 들여놓으셨다. 감동적인 목사님 설교나 크리스천 간증 테이프를 복사해서 이웃들에게 전도편지와 함께 보내셨다. 집에는 하루 종일 목사님 설교와 성도들의 간증 오디오 테이프가 틀어져 있었다. 집에 있을 때 저는 하루 종일 설교와 간증을 들으면서 지냈다.





나는 더 이상

그때 그 시절 나는 아니다


우리의 생각만큼 돈과 행복의 연관관계는 없다.
돈이 있다고 행복하지도 않고, 반대로 돈이 없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돈이 없으면 많이 아주 많이 불편할 뿐이다. 돈이 없다고 자유가 없는 아니다.
경제적 자유 가운데 일부의 자유가 없을 뿐이다.
돈이 세상을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기는 하다.
사랑과 행복과 돈 세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던 그런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른들에게 칭찬이 자자하고, 교회 집사님 중에서도 나를 존경한다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주변에서도 훌륭한 아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착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내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께서 프로그래밍 해 주신 대로 나는 어린 시절을 그렇게 살았었다. 20대 30대 때 조울증으로 아파서 부모님 고생도 많이 시켰지만, 내 이웃들이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은 훌륭한 소년이었다.


20대 30대 때도 세속과 구분이 되는 그렇게 성자 같은 삶을 살아갔거나,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세속적으로 살아갔어야 했는데, 교회 안에 남아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뿌리를 내린 것도 아니고,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면서 인생의 스텝이 꼬여 버렸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는 아니다. 20대 30대를 잃어버려서 현재는 자본도 부채도 아무것도 없지만,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글과 책을 쓰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있다. 나는 지금이 어렸을 때 찬란했던 그 시절보다 더 좋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지금 손에 든 것이 아무도 없지만, 아내 에미마와 함께하는 지금이 나는 좋다. 과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평생 사랑하며 함께 갈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 친구 에미마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에미마를 사랑하는 것도 내 삶의 중요한 우선순위지만, 내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우선순위이다. 직업으로서 작가가 되어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것도 사실, 사랑하는 아내 에미마와 이 세상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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