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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Jun 02. 2022

슬픔의 한가운데에서

밤늦게까지 글을 썼다. 보통 늦은 시간까지 글을 쓰면 아내 에미마가 자라고 타박을 한다. 조울증 재발을 방지하는데 잠을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날이 지방선거로 쉬는 날이라 회사에 가지 않으니, 쓰던 글 다 쓰고 자겠다고 하니, 아내는 별말 없이 안방에 들어가 요한이와 먼저 잤다. 글을 쓰다 보니 자정을 훌쩍 넘었고, 새벽 1시를 넘어서야 글쓰기를 마쳤다. 아내와 요한이가 자는 안방에 들어가니, 아내가 침대 전체에 몸을 뻗고 자고 있었고, 아내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작은 방으로 갔다.


새벽 2시 즈음이었다. 마루에서 소리가 들려 나가 보았다. 불 꺼진 부엌 구석에서 아내가 네팔어로 전화를 하며 울고 있었다. 네팔어를 모르지만, 아내의 흐느끼는 목소리와 모습의 정도를 보고, 네팔에 가까운 누군가에게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오빠, 에스더가 수어사이드 했어."


에스더는 에미마 오빠의 딸이다. 남자가 있었는데 남자 집에서 둘의 사이를 반대했나 보다. 종교와 카스트 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다. 남자 집의 반대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예쁘고 착하고 순수한 에스더를 가지고 놀았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금 그 남자는 자신과 사랑했던 여자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화살을 돌릴 생각만 하고 다. 에스더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남자는 에스더의 사랑을 받을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내 눈에도 에스더의 모습이 선하다. 만 17살이다. 우리랑 네팔이랑 학제가 다르지만, 우리로 따지면 고등학교를 이제 막 졸업했다. 예쁘고 착하고 밝고, 아빠를 자신의 영웅이라 부르며 사랑했던, 꽃과 같이 빛나는 아이였다. 일반인 중 예쁜 소녀 정도가 아니라, 미인대회를 나가거나 연예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에스더 본인만 좋다면, 한국에 데려와 공부를 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학비는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길을 알아보고,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 되지 싶었다. 한국이 좋으면 졸업 후 한국에서 좋은 사람 만나서 살아도 좋겠다 싶었다.


에스더는 아내 에미마에게 네팔에 언제 오냐고, 요한이 보고 싶다고 빨리 오라고, 그랬다고 한다.


아내 에미마와 네팔에서 결혼을 하고 신혼생활을 할 때, 방 두 개를 빌려 아내의 오빠 가족이랑 몇 개월을 같이 살았었다. 아내는 결혼비자와 대학원 논문 통과 절차를 밟고 있었고, 아내의 오빠는 일본에서 일하다 캐나다로 일하러 가는 사이 네팔에 들어와 있었다. 그때 에스더도 우리와 함께 있었다.


나도 이렇게 마음이 찢어지는데, 아내와 장인어른 장모님과 아내의 오빠의 슬픔은 헤아릴 길이 없다. 인도에 있는 아내의 여동생은 네팔 집으로 향하고 있고, 캐나다에 있는 아내의 오빠는 집으로 갈 절차를 밟고 있고, 아내는 우리 집에서 망연자실 슬픔에 젖어있다. 우리는 보내드릴 수 있는 돈을 보내드린다. 뭐라 위로할 말이 없다. 아내가 가족과 통화를 하는데 곁에 있는데도 인사조차 드릴 수 없다.


페이스북 메신저 라이브 영상과 사진으로 에스더의 시신을 보았다. 눈을 감은 에스더는 자고 있는 듯하다.


아픔 고통 그리움 슬픔이 없는 그 나라에서 평안 가운데 영원히 쉬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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