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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 왕대추농장

by 최다함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다. 야간제로 신학대학원을 다니시고 목사님이 되셔서, 퇴근 후와 주말에는 개척교회 목회를 하셨다. 투잡은 아니셨다. 교회에서는 사례비를 받지 않으시고 봉사하셨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정년퇴직하시면서 품게 된 꿈이 있으셨다. 노년에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다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사랑하고 섬길 첫 번째 이웃은 스물한 살 조울증에 걸려 제정신 못 차리고 사는 나였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스트레스받지 않고 평생 일할 평생직장을 만들어 주고 싶으셨다. 아버지 고향 논산으로 나를 데리고 귀농하시기로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데리고 다니시며 수 백 시간의 교육을 함께 받으셨다.

귀농교육을 받으시면서 아버지께서는 왕대추를 작물로 선택하셨다. 일반 대추는 약재로 먹는데, 왕대추는 달걀처럼 크고 사과처럼 달아 과일로 먹는다. 귀농인의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판로다. 농사를 잘 지어도 팔리지 않으면 농작물을 갈아엎어야 한다. 우리 농장에서 나오는 왕대추는 아버지 어머니 지인들에게 직거래로만 팔아도 물량이 딸린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위해 농장을 시작하셨다. 2018년 12월 네팔에서 결혼하고, 이듬해 5월까지는 네팔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2019년 여름과 가을 부모님과 아내랑, 주중에는 논산에서 농사를 하고, 주말에는 수원에서 쉬었다. 블로그에 우리 부부 시골에서 왕대추농장 하며 재미있게 사는 글을 썼더니, 연합뉴스 TV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문화 가정이 행복하게 사는 삶을 담는 다큐멘터리였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방송 탔다.


농촌생활이 나빴던 것은 아닌데, 그렇게 전업농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왕대추농장에 빛이 보이니, 아버지께서는 나의 평생직장이 될 만큼 농장을 확장시킬 꿈을 꾸시기 시작하셨다. 나는 글은 쓰며 사는 전업작가가 될 때까지만, 반 귀농 반 귀촌 생활하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려는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위한 아버지 마음은 잘 알고 감사했지만, 평생 농부로 농장의 소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왕대추농장을 완전히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의지로 농장 이름은 여전히 내 이름을 딴 다함 왕대추농장이다.


그래서 2020년 신년 초부터 수원고용센터를 찾아갔다. 취업 상담을 받고, 취업 훈련을 받았다. 출판 편집디자인 과정을 국비지원으로 이수했다. 북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도, 취업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글 쓰는 작가가 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나는 농장을 떠나 도시로 돌아왔고, 부모님께서는 삶의 터전을 논산 시골집으로 완전히 옮기셔서, 왕대추농장을 하시며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아직 글 써서 먹고사는 전업작가가 되거나, 디자이너로 취업에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동생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디자이너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때 익힌 기술로 매니저로서 디자인 일도 한다. 아버지랑 왕대추농장을 하다가, 국비지원으로 취업 훈련을 받았고, 지금은 동생 회사에서 일한다. 나의 꿈은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와 책 읽고 글 쓰며 전업작가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고 글 써서 돈 벌어 생활이 되는 언젠가가 이르면 말이다. 그날이 속히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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