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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Sep 27. 2022

아내 에미마와 인연이 닿았다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다. 아버지의 꿈은 교회 목사님이었다. 7남매를 둔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서, 당시 2년제였고, 학비가 쌌고, 군대에 가지 않았던, 교대에 가셔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셨다.


후일에 직장을 다니시며 야간제로 신학대학원을 나오셔서 목사님이 되셨다. 개척하신 교회에서 일절 사례비를 받지 않으셨으니, 투잡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정년퇴직하실 때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노년의 꿈은 주변의 이웃을 돕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도울 이웃 1호는 스물한 살에 조울증에 걸려, 인생의 길을 잃어버리고, 오래 방황하고 있던 나였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데리고 논산 시골집으로 귀농하셔서 나의 평생직장으로 농장을 만들어 주시려고 했다.



아버지께서 은퇴하시고 주변 이웃을 돕는 첫 프로젝트는, 명예퇴직하시고 철원 DMZ에서 아로니아와 오미자 농사를 하시고 계시던 둘째 고모부 농장에 일손을 도우러 가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고모 내외 분 농장에 나도 데리고 가셨다.


아버지 시점에서는 데리고 가셨고, 내 시점에서는 끌려갔다. 물리적 힘으로 완력으로 끌고 가셨던 것은 아니나, 특별히 하는 것 없이 집에서 멍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내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 이미 직업으로서 전업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각성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글을 써야 하는데. 작가가 되어야 하는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나의 첫 번째 책이 될 이야기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 따라서 철원 고모 내외분의 농장에 여러 차례 일손을 도우러 갔다. 물론 내가 갈 때마다 고모께서는 용돈을 주셨다.


부모님께서는 철원 고모께 부탁 하나를 하셨다. 철원 고모 내외분께서 아주 오래전에 네팔로 단기 선교여행을 다녀오신 적이 있으셨다. 부모님께서는 고모에게 네팔에 있는 고모 지인을 통해 '신앙이 좋고, 사랑이 많은' 네팔인 자매가 있으면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하셨다.


당시 나는 이미 내 인생의 사랑과 결혼을 포기했을 때였다. 부모님 생각은 다르셨다. 신앙이 깊고 사랑이 많은 아내랑 행복하게 가정을 꾸려 살면 내가 조울증에서 회복될 것이라 생각하셨다. 한국 여자는 어렵다 보시고, 고모를 통하여 네팔 여자를 알아보기로 하셨다.

 

고모는 나의 생각이 어떤지 물어보셨다. 소개를 했는데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단 한 번도 국제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다. 안 한다고 했는데 부모님 발 나의 결혼 프로젝트는 이미 공 굴러갔다.


마침 네팔에 있는 고모 지인이 딸처럼 생각하는 훌륭한 자매가 있다고 했다. 아내 에미마였다. 에미마도 국제결혼에 대하여 나처럼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에미마와 나는 서로에 대한 소개를 전해 듣고, 서로의 사진을 먼저 전달받았다. 에미마와 내가 사진 교환을 했다기보다, 중간에서 다리를 놓는 분들이 전달해 주셨다. 어머니께서는 에미마 쪽에 나의 아팠던 사정과 현재 상황을 솔직히 전달하셨다. 물론, 어머니께서는 내가 사랑으로 회복되면 예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미래도 이야기하셨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하고, 에미마는 기도를 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결혼하기로 마음을 결정한 후에, 카카오톡으로 랜선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에미마와 카톡으로 사귀기 시작한 게 2018년 5월인가 6월이었다. 그해 9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처음 만나 양가 부모님과 약혼식을 하고, 같은 해 12월 다시 네팔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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