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에미마와 나는 서로에 대한 소개를 듣고 결혼하기로 결심한 후 카카오톡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네팔에서도 카톡을 쓰는 것은 아니고, 에미마가 나랑 대화하기 위해 카톡을 깔았다.
신기하게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랜선으로도 우리는 서로 사랑에 빠졌다. 사랑이란 그런가 보다.
에미마는 네팔에 있었고, 나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첫 만남을 가질 수가 없었다. 코로나 전 네팔은 도착비자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 표만 사서 가면 되었다. 다만, 한 번의 만남에 많은 돈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를 만나러 네팔에 처음 갈 때 약혼식을 하고, 두 번째 갈 때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네팔의 에미마 지인들을 모시고 약혼식을 성대하게 하는 것이었다. 성대하게라는 것이 교회에서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게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국제결혼이 처음이라 국제결혼을 전문으로 하는 행정사를 찾아갔다. 네팔 한국 양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에미마의 결혼비자를 발급받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결론적으로 주 네팔 대한민국 대사관 홈페이지 자료실에 들어가 국제결혼 결혼비자 관련 서류를 찾아보며 꼼꼼히 읽어보고 스스로 할 것 그랬다 생각한다. 물론, 행정사 사무실에서 대신 작성해 준 서류도 있고 분명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거기에 상당한 돈을 쓸 필요는 없었지 싶다.
행정사에게 네팔에 처음 가서 약혼식을 하고 두 번째 가서 결혼식을 하기로 한 플랜을 말했다. 행정사는 결혼비자 신청서 서류상으로 서로의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을 증명해야 하는데,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약혼식을 하면 말이 되겠냐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약혼식 플랜이 엎어졌다. 그러다가 약혼식이 아니더라도 결혼식 전에 나라도 네팔에 가서 에미마를 만나러 가기로 일이 전개되었고, 나의 이모들이 부모님께 나 혼자 보내지 말고 같이 가라고 해서 일이 다르게 흘러갔다.
에미마랑 나는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트리부반 국제공항에서 처음 만났다. 결국, 지인들을 모시고 성대한 약혼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네팔의 한국식당에서 양가 부모님과 우리 사이를 다리 놓아주신 고모 지인 내외 분을 모시고 양가 상견례 겸 약혼식을 약소하게 올렸다.
다음 날 에미마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우리 부모님과 넷이서 히말라야의 도시 포카라로 약혼여행을 떠났다. 원래는 오스트리안 캠프로 트래킹을 가려했는데, 어머니께서 마침 그때 족저근막염으로 많이 걷기 힘드셔서, 차로 갈 수 있는 곳에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여행을 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고, 포카라에서는 짚차 한 대 빌려서 다녔다. 렌터카를 빌린 것은 아니고, 현지인 운전사까지 빌렸다. 아버지 친구분 아들인지 조카인지 마침 포카라에서사시는 한국 분이 있어 가이드를 해 주셨다.
낮에는 여행을 다니고, 저녁에는 호텔에서 시간을 보냈다. 잠은 아내와 어머니가 한 방에서, 나와 아버지가 다른 방에서 잤지만, 저녁 식사 후 취침 전까지 에미마랑 단 둘이서 한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만약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었고, 둘이 키스를 하지 않고 손만 잡았다면, 우리는 결혼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에 돌아와 결혼을 코 앞에 두고 조울증이 재발하여 병원에 잠시 입원했다. 약을 먹고 있어서 크게 재발한 것은 아니고, 짧은 입원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다만, 조울증 모드에서 내가 에미마에게 우리 그만하자 하고 연락을 끊었고, 나는 가출해서 삶을 끝내려 했고,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아내 에미마가 나를 놓지 않고 붙잡아 주어 지금까지 오게 되었는데, 나는 우리 약혼 여행 때 키스가 우리 인연을 붙잡아 주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