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으로 살았을 때가 언제였더라?

사라진 내 심지(心地)

by 임다희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살 수 없지만, 의도적으로 나에게 집중해보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100세 시대를 전망하는 요즘 나의 삶은 아직 절반도 미치지 못했지만 마흔을 넘었으니 나의 삶을 되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도 삶이 불안으로 채워져 있고 앞으로의 삶이 막막할 것 같은데 정말 90세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대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불과 4-5년 전만이라도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낄 때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전보다 나아진 내가 되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나는 더 초초해지고 불안해졌다. 무엇보다도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잘 살 수 있을까? 에 대해 일말의 긍정조차 사라진 기분이었다.



죽을 때까지 물어볼 것 같은 질문 Who am I?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질 수밖에 없었다. 10대 때부터, 20대, 30대를 돌아보니 나는 조금씩 변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알고 있는 나에 대해 말해보자면, 나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맡은 일, 주어진 일에 책임감이 강하다. 성취욕이 큰 만큼 그에 따른 인정 욕구도 높은 편이다. 기대한 만큼 인정을 얻지 못하면 이 일 혹은 과정이 나와 맞지 않은 건지 금세 의심을 해본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편안한 사람으로 인상 깊게 봐준다. 인상 좋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 편이라 이것이 나의 치명적인 생존 전략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번 상처받으면 봉우리가 단번에 웅크려지듯 마음을 닫아버린다. 상처받은 일에 잘 기억하고 소심한 편이다. 자존심 세고 자존감은 사회생활하면 할수록 낮아졌다. 30대 중반부터 불안과 자책은 늘 함께 살아왔다. 겉모습과 다르게 나는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주체적인 삶이란 외부로부터 휘둘리지 않으며 나를 믿고 존중하며 어떤 결정의 선택 순간에 능동적 자세로 임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 테다. 이런 완벽한 아포리즘을 쉽게 입 밖으로 꺼낼지언정 뜻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행복이란 ‘행’하면 ‘복’이 온다는 문장을 SNS에서 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이행시를 만든 것 같았는데, 그 풀이가 찰떡궁합처럼 다가왔다. 불안을 없애려면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하라는 주문 같았다.



내 심지(心地)는 어디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내 마음 중심에 양초 속에 박힌 단단한 심지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안에 심지가 있긴 한 걸까? 심지 같은 것은 어딘가 박혀 있겠거니 하고 나는 양초의 겉모양과 빛깔에만 더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보니 나의 주의는 내 중심이 아닌 타인을 향해 있었고, 타인의 평가에 기대어 스스로를 판단했다. 남들이 잘했다고 칭찬하고 인정해주는 쪽으로 나를 맞췄다. 이런 나의 태도가 반복되고 익숙해지면서 나의 가치관은 바람결 따라 드러눕는 갈대가 되어 갔다. 불만과 불평이 생기는 상황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한 채 타인 혹은 외부에서 이유를 찾으려 했고 복잡하고 힘든 상황이 닥치면 회피하려고만 했다. 유일하게 믿었던 구석은 시간이 해결해 줄 꺼라며 상황에서 벗어나기 급급했다. 윤리적, 도덕적 잘못으로 저지른 죄는 아니었지만 나의 내면에게는 몹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한 번도 제대로 치료해준 적 없었던 나의 상처들. 관성처럼 해 왔던 방법은 상처로 받은 (마음) 통증에 대한 호소였다. 그 상처가 알아서 아물 기만을 기다렸다.


일이든 사람이든 어긋남을 감지하면 나는 일단 버틸 수 있는 나의 역량만큼만 방어하려고 한다. 멘붕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에 최후의 방어법은 멘붕 화살의 촉을 나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더 잘하지 못해서 벌어진 결과라고 사소한 일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나를 책망하고 구석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겉보기에는 어느 구석 이상한 곳이 없어 보여도, 속은 점점 연약해지고 병들어 갔다.



왜 다른 식으로 볼 수 없었을까?

같은 문제를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려니'가 되지 않는다. 손바닥 툴툴 털고 일어날 수만은 없게 된다. 고질 병이구나를 깨달았을 때, 나를 주기적으로 괴롭히는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좀 알고 싶어졌다. 생각과 뒤섞어진 잡념 때문에 머릿속은 어지러운 상태다. 잡념을 걷어내야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뭐가 잡념인지 생각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낮아진 자존감, 괴로움과 불안으로 인한 두려움과 예민함 때문에 잡념이 생각을 가로막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러다가 무너지나? 애잔하고 초라해진 나를 구원할 사람은 오로지 나뿐인데, 무너지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