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앞둔 이의 고민
일주일 중 두 번 화요일과 금요일만 사무실 출근을 한다. 구성원 70프로는 재택근무를 권고한다는 회사 지침에 따라 팀 내 파트별로 출근 날을 지정한 까닭이다. 지침대로 지난 화요일 아침, 노트북 가방을 들고 수많은 직장인 틈에 껴 지하철 환승구간을 빠른 속도로 걷는다. 오늘도 애쓰러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하나같이 비슷하다. 모두 같은 표정만 짓고 있는 뒤통수들을 나 역시 영혼 없이 쳐다보며 걷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노트북 가방이 무겁다. 노트북과 회사 노트 말고 내가 또 뭘 넣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찰나 패딩점퍼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광고성 알림이겠지 뭐 하며 핸드폰을 열었는데, 주거래 은행에서 온 입금 알림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25일은 그러니까 월급날이다. 게다가 이번 달에는 월급 말고도 추가로 정산되는 급여 항목이 있다. 지난해 실적에 대한 성과급과 다 소진하지 못한 연차수당에 대한 정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1월의 월급을 마지막 잔치상이라 부른다. 물론 바람같이 지나가는 통장의 잔고를 보면 잔치상의 여운은 하루 이상 버티기 힘들다.
얼마 전 회사 블라인드(익명 게시판을 운영하는 앱)에 작년 실적에 비해 성과급을 적게 받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들로 도배가 됐었다. 숫자 분석에 능통한 몇몇 직원들(나에게는 더없이 똑똑해 보이는 동료들)은 분기별 영업 실적을 비교 분석해서 루머로 떠도는 성과급의 낮은 지급률에 대해 빗발치듯 비난의 글들을 올렸다. 말도 안 되는 지급률이라며 분노하는 글들과 직원을 소, 돼지로 취급한다며 더 이상 못 다니겠다는 댓글들, 심지어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욕설이 난무한 글까지 연이어 게시됐다. 회사 경영진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한 부당한 감정, 자신의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억울한 마음을 불같이 표출하는 동료들의 글들을 읽으며 나는 마음속으로만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서는 회사에 심드렁해진 나는 성과급을 어떤 이유로 덜 받게 될지라도 그려려니 하려고 했다. 조금 억울할 수는 있겠지만, 회사에 신뢰가 점점 사그라지는 만큼 동시에 없어지는 것은 희망을 품고 있던 기대심이었다.
아무렴 상관없어. 어차피 곧 나갈 테니까.
별생각 없이 열어본 핸드폰 창에는 생소한 입금 금액이 떠있었다. 뭐지? 작년에 소진하지 못한 연차 수당 금액인가? 아니면 정말 정녕 고작 이 금액이 인센티브인가? 꼬리처럼 물고 늘어지던 의문들이 일렁이는 중 4번의 입금 알림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이 중에는 한 단위가 더 붙은 금액도 있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통장 잔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풍성해진 숫자들의 입금 내역을 보면서 성과급, PS(profit sharing, 이익 분배제), 연차보상, 그리고 이번 달 월급까지 따로 입금이 된 거였다. 근데 예상보다 많네? 역 출구까지 가장 최단 거리로 빠져나갈 수 있는 열차 객실 문을 찾으면서도, 나는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며 걸어갔다.
오늘 나의 첫 번째로 할 일은 이번 달 급여 내역을 찬찬히 확인하기로 정하는 순간, 온몸에 도파민이 퍼지는 듯 활기가 돌았다. 마스크 뒤로 입 꼬리는 나도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 지하철의 쿰쿰한 공기 냄새마저 프레쉬함을 느끼는 이유는 단연코 통장 잔고의 덕 일 테다. 도착역에 내려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오늘만큼은 회사가 화기애애하려나? 이 정도면 블라인드에서 떠돌던 지급률보다는 훨씬 많은 것 아닌가? 나는 만족하는데 블라인드에 맹렬하게 비난을 퍼붓던 동료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몇 년 전 이와 비슷하게 성과급이 넉넉했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과 그때와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그때는 내가 회사를 많이 좋아했다는 거? 콩깍지가 제대로 쓰여 있었다. 회사의 성장과 나의 성장을 동급으로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회사는 매출과 영업이익의 황금기를 걷던 때였고 직원들에게 넉넉한 성과급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풍요로워진 통장 잔고에 나의 성취감은 배가 되고 동기부여는 그 값 절로 증폭됐었다.
4년 전의 기억과 비교해서, 마치 메마른 땅에 내린 단비 같은 이번 성과급에 대해 나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0 하나가 더 붙은 성과급에 더 이상 나의 영혼을 팔아서는 안된다고, 혹여 49:51로 마음이 기울였다면 얼른 다시 반대쪽으로 향해야 한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봐 돈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겠니? 돈에 대한 욕망이 꿈틀대며 시커먼 먹구름이 꼈던 회사에서 후광이 빛나고 있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감사한 월급과 더불어 예상치 못한 성과급은 직장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해택이자 꿀단지다. 거르지 않고 매 달 입금에 대한 안정감은 사옥의 두꺼운 콘크리트 벽만큼이나 삶의 일정 수준을 안온하게 해 준다. 그 일정 수준만큼만 안온함을 지속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이 안정감에 더 이상 나의 목을 매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강해졌다. 회사의 나와 나의 회사 애정을 품었던 관계였지만 둘 사이에 신뢰가 깨지던 지점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쌓인 배신감 같은 거였다. 웬만하면 회사 편이었던 내가 변해갔다. 그런데 말이야. 변할 거야! 가 아니라 변했네 인 줄 알았던 내가 통장잔고를 보고 흔들리고 있었다. 성과급 한방에 나의 욕망이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말자. 잔고는 잔고일 뿐 이것을 나의 미래와 바꾸지 말자.
다행스럽게도, 나의 욕망은 금세 침착해졌고, 정신도 얼마 안 있어서 돌아와 주셨다. 흔들리지 말자고. 잔고는 잔고고 오늘의 잔고에 나의 미래를 맡기지 말자고. 그렇다고 그동안 나의 생활 전선의 안정화를 위해 꼬박꼬박 지원을 해준 회사에 대한 고마움과 도망갈 뻔한 애사심을 성과급 덕에 다시 붙은 동료들의 마음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필요에 따라 이번 달 월급은 꽤 소중하고 값지게 쓰일 테니 말이다. 다만 이 달콤한 유혹이 지금 나에게 귀책사유가 돼서는 안 된다는 퇴사 준비생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