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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hl Apr 21. 2019

차도남인 줄 알았던 따시남

알기 전엔 몰라요, 차도남인지 따시남인지

  매일 같은 시간 일면한 수백의 사람들과 함께 몸을 싣는 지하철, 그 안에서 나는 일반화된 존재가 된다. 윤상의 노래 제목과 같은 '어떤 사람 A'가 되는 순간.


널 위한 무대 위에서 난 언제나 그냥 지나가는 사람 이름도 없이 대사도 없이  
화려한 불빛 아래 서있는 너의 곁을 잠시 지나가는 사람 운명이 네게 정해준 배역 어떤 사람 


여느 때와 같이 바퀴가 레일에 부딪는 잔잔한 진동을 느끼며 열심히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출근시간을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넓고도 깊은 인터넷 사막에서 애써 유익할지도 모를 티끌을 찾아 헤매는 무표정한 나를 발견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떤 사람 B, 어떤 사람 C, 어떤 사람 D... 모두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의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따뜻할 B, 누군가에겐 재밌을 C, 그리고 누군가에겐 너무도 사랑스러울 D가.




차도남

차가운 도시 남자


비가 오는 주말, 칙칙 거리는 기차를 타고 본가에서 올라와 급히 지하철 강남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내고 서둘러 간 자리엔 그가 없었다. 왼쪽 가슴 한편에 불안의 불씨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연락을 해볼까?'하고 핸드폰을 꺼내는데, 저 앞 건물 밑에서 한 손에 긴 우산을 든 그가 걸어 나왔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 셔츠 위로 주홍 빛 니트를 입고 투 블록으로 자른 머리를 2대 8 가르마로 가지런히 정리한 모습이, 막연하게 그리던 서울 도시 남자의 표상 같았다.


비를 피해 처마 밑 벤치에 앉아있던 그는 나를 처음 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안내했고, 우린 해산물 크림 파스타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밥을 먹고 다시 그의 안내에 따라 그가 가끔 간다는 카페로 향했다. 중앙에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는 피아노 카페였다. 우리는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앉아, 이따금 찾아오는 정적을 물리치려 은밀히 대화 주제를 퍼올렸다.


대학을 다니며 서울생활을 시작해 아직 서울보단 광주에서 지낸 날이 더 많아서인지, 파스타를 즐기고 피아노를 치는 그 도시남은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집에 오는 길에 대화 도중 잘 웃지도 않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니 마음이 헛헛했다.



따시남

따뜻한 시골 남자


의아하게도 도시남은 꾸준히 연락을 해왔고, 우리는 이후 몇 번을 더 만났다. 그러던 11월의 어느 밤, 그가 좋아하는 맥주를 사서 집으로 찾아왔고 근처 공원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던 우리는 그 날로 연인이 되었다. 


흔한 캔맥주가 싫었는지 병맥주를 사 온 덕에 병따개도 없이 쩔쩔매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차도남의 것이 아니었고, 이후 함께하는 날들을 더해가며 첫 만남에서의 모습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전혀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가끔 화가 나면 그때의 차가움이 불현듯 얼굴 위로 떠 올라 여전히 나를 슬프게 한다.)


집이 가까운 그는 내가 늦은 퇴근을 하는 날이면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온다. 너무 늦을 때면 이미 잘 준비를 다 해 스프레이로 단단히 고정시켰던 곱슬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져있고, 늘 입는 얇은 패딩 아래로 보풀이 인 츄리닝 바지를 걸친 그를 볼 수 있다. 


수도권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서울처럼 느껴졌던 경기도는 정말 넓었다. 경기도 출생인 그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피자를 처음 먹어봤고, 명절이면 고향 친구들과 비닐하우스에 모여 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가 후에 고백하길, 첫 만남 때 갔던 레스토랑과 카페는 그전에 딱 한 번 가봤던 곳이었다. 잘 웃지 않았던 건 긴장한 탓이었고 그도 나를 차가운 도시 여자라 생각했다고. 그때 서로를 첫인상으로 단정 짓고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본다. 


다행히 잘 모르던 때 한없이 차가워 보였던 그 얼굴은 서로 알아가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한없이 따뜻한 얼굴이 되었다. 나를 위해 이전엔 들어보지도 못했던 크림 브륄레나 에끌레어 같은 디저트를 찾아 선물하는 그는 차가운 도시 남자가 아니라 '내게만은 따뜻한 시골 남자'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그는 여전히 차도남일 것이다. 연인이 되기 전에 내가 느꼈던 것처럼. 지하철에서 만난 어떤 사람 E는 어쩌면 따시남일지도 모른다. 연인이 된 후 알게 된 그의 진짜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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