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보내지 못하는 것
바쁜 세상.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해가는 세상의 모습. 그 모습 속에서 멈춰 있는 것은 시간이다. 당장 시계를 보아도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은 어떻게 멈춰있는가. 똑같은 것을 경험할 때 나는 시간을 멈춘다. 같은 침대에서 같은 베개, 이불을 쓰고 잠에서 깨어나 모든 것이 똑같은 천장, 집안 풍경, 밖으로 나와서 똑같은 거리, 가게들을 보면서 걷는다. 그러다 문득 바뀐 가게가 눈에 들어올 때면 잠시 시간이 흐른다. 지나온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대로 마음속에 깊이 남는다. 흘려버린 것들은 멀어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주변을 맴돈다.
항상 똑같은 곳에서 지낸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모든 곳을 지나갈 때 마치 당장 어제 있었던 일들처럼 어릴 적이 떠오른다. 이곳에서 무엇을, 저곳에서 그런 일을-하면서 옛 생각 아니, 흘렀던 시간을 떠올린다. 이런 시간에 빠질 때면 잠시라도 뛰기 힘든 몸이 날아 갈듯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내 멈춰 선다. 마냥 똑같아 보였던 세상에 달라진 부분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멈춘 시간이 다시 흐른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이 떠오를 때면 동시에 불행함이 찾아온다. 그때의 행복을 지금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라기보다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겨내지 못했던 아픔에. 분명 이곳을 함께 걸어가던 사람이 있었는데, 함께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얘기하며 웃고 울던 사람이 있었는데 흘려보내야 했던 감정들이 아직까지도 맴돌아서 이곳에 남아서 나를 괴롭힌다. 성시경 님의 ’ 거리에서‘라는 노래는 거리에 묻어 있는 헤어진 연인의 모습을 회상하고 잊지 못한 감정에 물들어 있는 사람을 보여준다. 우리의 기억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존재한다. 분명 시간에 기록되어 있던 것은 웃음뿐이었지만 그 순간에 보이는 모든 환경은 사소한 하나라도 나타나는 순간 그 시간으로 돌려놓는다. 같이 먹은 적 없던 음식에서 함께 먹었던 음식의 익숙한 맛이 느껴질 때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것이 마치 저주에 가깝다. 흘려보내지 못하고 맴돌아 있는 시간을 쫓는다. 흘러버린 시간에 다가서려는 말도 안 되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변한 것이 확실하다.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이 변해버린 거리에서 나는 아직도 옛날을 생각하고 떠올린다. 다시는 마주 할 수 없는 시간임을 모습임을 알고 있음에도 끝끝내 놓지 못한다. 느끼지 못한다. 인정하지 못한다. 내가 사랑했던 시간을 쏟았던, 그리고 그 속에 묻어진 수많은 순간에 떠오른 감정을 잃었다는 것을 아무것도 수용할 수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이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서도 그때의 시간에 미련이 남는 것이 이토록 잔인할 줄은 몰랐다. 왜 아직도 남아있는 것인지. 변한 모습에 다시 빠져서 살아서 다른 시간을 채울 수 없는지. 이미 남은 시간을 지우고 새로운 시간을 남겨놓고 싶다. 어째서 그런 기능은 남겨주지 못했나. 컴퓨터 마냥 휴지통에 넣어두었다가 잊어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큼지막한 폴더 하나를 모두 지우고 싶다. 이러면서도 차마 완전히 지우지 못해 휴지통에 넣어놓은 체 비우지 않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사놓은 두꺼운 책을 펼 용기는 내지 못하는 것처럼 그 시간과 기억을 열지 못한다. 하지만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은 또 어떤 이유일까. 지독하다. 때어놓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했으며 남겨놓기엔 너무도 아프고 미련하다.
눈을 내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어 처음으로 되돌리듯이 내리깐 눈은 거리의 풍경을 느끼지 않게 하여 걷는 길에 새로움을 불어넣는다. 결국 시간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이런 지독함을 또다시 찾을 수 있을까. 아마 다시 찾아내어도 그때와는 또 다름일 것이다. 나는 실수를 반복한다. 덮어써야 할 기억을 따로 저장한 체로 머리가 터질 때까지 밀어 넣는다. 그렇게 저장된 수많은 폴더는 그만큼의 시간을 남긴다. 오늘의 세상은 아름답다. 그때의 시간이 아름다웠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