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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Dec 07. 2023

소개팅

 아, 귀찮다. 나는 바라지도 않던 소개팅에 끌려나가야 한다. 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혼자서도 할게 많고 돈 쓸 곳도 많고 심심하지도 않은데 굳이 굳이 맨날 남자들이랑 놀고 혼자 노는 내가 안쓰럽다며 마음대로 소개팅을 잡아버린 친구 놈. 옛날이었으면 소개해줄까?-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먼저 해달라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연애가 너무 피곤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친구 놈의 체면을 위해서 적당히 챙겨 입으며 가서 잠깐 얘기만 나누다가 죄송하다 하고 빠져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나도 기왕 소개팅인 거 즐기고 오자하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자리가 너무 싫은 걸 어떡하나. 예전에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말하던 것도 마냥 운명적인 상대를 찾겠다는 마인드라기보다 소개를 받는 순간 상대방에게 서로의 매력에 대해서 알아가는 단계가 아닌 사무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골라 잡는 기분이 들어서 부정적이다. 그런 계산적인 자리가 싫다.


 어차피 오늘도 서로 만나서 간단히 인사하고 주변에 깔끔한 밥집을 갔다가 카페에서 뻔한 얘기, 취미를 묻고 평소 여가활동을 물어보다 헤어지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나중에 집에 가서 뭐 하지-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약속장소에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해서 어디 있나 하고 둘러보던 찰나, 갑자기 내 앞으로 한 여자가 튀어나왔다. 처음 보는 사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과하게 반가워했다. 내가 인사도 하기 전에 이미 자신이 어떻게 소개를 받게 됐고 어떻게 해달라고 했는지 모든 얘기를 다 하고 있다. 어떻게 저렇게 쉬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나, 저건 확신의 대문자 E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술을 좋아하냐고 묻는다. 좋아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마신다고 했더니 곧장 자신이 자주 가는 고깃집에서 반주를 하자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유를 신나게 설명하면서 이미 설렘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정말 자주 오는 듯 사장님과 친하게 얘기하며 주문을 하고 식전에 나온 계란찜을 한입 가득 넣으며 나도 꼭 먹으라고 권한다. 뭔가 어색하지도 쓸데없는 격식이 있지도 않아서 편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불편하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선과 달라서 그런 것인지 그녀의 과한 외향성이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좀 남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예의상 고기를 구워주려 했는데 자기가 고기를 진짜 잘 굽는다고 집게를 가져가 이미 구우며 대신 술 좀 따라달라고 말한다. 그녀의 술잔을 따라주고 내 잔도 따르려는 순간 자신이 따라주겠다며 금방 집게를 내려놓고 술병을 받는다. 잘 익은 고기를 불판에 내 쪽으로 두고 먼저 먹어보라고 말하며 집중해서 고기를 본다. 진짜 잘 굽는다. 적당히 익어서 질기지도 않고 설익은 곳도 없다. 맛있다고 말하고 고기를 굽는 그녀를 위해 쌈을 하나 싸서 줬다. 그녀는 갑자기 빵 터져서 웃더니 고맙다고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웃음이 터졌다. 왜 웃었을까. 서로 고기를 먹고 잔을 치다 보니 어느새 이미 각각 2병씩은 마셨다.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조금 힘들어 보였는지 이제 그만 마셔도 된다면서 내 술잔에 있던 술을 자신의 잔에 붓는다. 뭔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여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주도적이다. 그리고 행동에 스스럼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거나 마냥 자신의 뜻을 미는 사람은 아니다.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아쉽다. 오늘의 소개팅에서 확실히 느꼈다. 이 사람은 나와 연인이 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사람의 높은 친화력 덕분에 쉬이 친해지고 내가 싫어하는 소개팅처럼 딱딱한 자리가 아니라 편하고 좋았지만 그런 만큼 서로의 이성적인 매력은 느끼기 어려웠다. 나는 왜 사람들이 이성을 소개받을 때 자신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연기하는지 이해하게 됐다. 왜 소개팅에서 서로의 취미나 취향을 물어보고 성격을 보고 외모를 보는지 알게 됐다. 그 불편함은 설렘이 될 수 있으니까. 오늘의 편함은 설렘보단 즐거움을 가져왔다. 서로 재밌는 얘기를 하고 웃고 떠들면서 고깃집을 배부르게 나왔다. 이미 술도 좀 마셨고 이 상태로 카페에 가서 얘기를 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집을 가려고 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놀아요.' 나는 오늘 소개팅을 한 걸까. 분명 새로운 좋은 사람을 알게 되었고 처음 보는 이성이었지만 그런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그 이상한 계산적인 자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 사무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충분히 즐겁게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녀의 말대로 끌려다니기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보여줬다면 좀 다른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지금의 인사에서 다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일어나 숙취에 머리를 아파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해장하실래요?' 아, 행복하다. 바라던 약속에 뛰쳐나가야 한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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